<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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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교수는 잠자코 담배를 재떨이에 문질렀다.
『월터 롤리를 아십니까?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중신인데 영국왕실내에 처음으로 담배피우기를 유행시킨 사람이랍니다….』 …어느날 롤리는 여왕앞에서 담배연기의 무게도 잴 수 있다고 허풍떨었다.「잴 수 있다」「없다」의 논쟁 끝에 내기를 하게 됐다.금화(金貨)가 탁자 위에 수북이 쌓였다.이기는 자의 몫이다.
여왕과 중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롤리는 파이프에다 담배를 눌러 담아 유유히 피우고 난 다음 재를 저울에 달며 말했다.『여왕폐하,방금 피운 담배무게에서 이 재무게를 뺀 나머지가 담배연기의 무게올시다.』 금화는 롤리가 차지했다.
『재치있는 사람이군요.』 을희는 웃었지만 고교수는 웃지 않았다.그 에피소드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월터 롤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여러 애인 중에서도 재치와 능변만 아니라 화려한 옷차림으로도 유명했습니다.큼직한 진주알을조끼나 구두에까지 잔뜩 누벼 달고 다녔다는데 여왕도 그에 못지않게 호화롭고 기발한 옷차림으로 신하들을 놀라게 했지요.3천벌이나 되는 옷을 가지고 있었다나요?』 …당시의 프랑스대사는 그녀의 대담한 의상에 관한 메모를 일기에 남겼다.황금띠를 두른 검정 공단 드레스는 허리에서부터 발치까지 앞트임이었다.게다가 안에 받쳐입은 하얀 공단 옷과 속옷등도 몽땅 앞트임으로 돼 있어서 여왕이 움직일 때마 다 그녀의 하반신이 남김 없이 드러나보였다.대사는 까무러치게 놀랐다.여왕이 자신의 넋을 빼고 유리한 외교술책을 펴려 했던 것같다고 그는 일기에 적었다….
『시대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소서노여대왕은 그런 잔재주는 부리지 않았어요.그야말로 거물이었습니다.』 고교수는 구실장의 날카로운 「도전」에 야하게 「응전」하고 소서노여대왕 얘기를 점잖게결론을 맺었다.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을희는 정밀하고 엄격한 제작일정 제시로 얼른 날려 보냈다.
표지엔 켄트교수의 해당화 그림을 빌려 쓰기로 했다.드넓은 바다를 향해 가시투성이 몸으로 피는 선연한 해당화가 바로 소서노여대왕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보스턴에 있는 켄트교수로부터 짤막한 사연이 당도한 것은 보름후의 일이 었다.출판사차린 일을 축하한다는 인사에 곁들인 그림 사용 승낙서였다.
인간의 인연이란 참 희한한 것이다.켄트교수의 그림을 표지로 쓰는 책을 펴내게 되리라고는 일찍이 짐작이나 했겠는가.가슴이 찡했다. 북 디자인은 구실장이 맡았다.최종 마감날 한밤에야 간신히 마무리됐다.통금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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