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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토론대회 16강’ 한국팀의 비결

중앙일보

입력

올림픽이 한창이던 지난 8월. 세계대회를 준비하는 또 다른 국가대표들이 있었다. 종목은 토론. 9월 5일부터 15일까지 미국 워싱턴주에서 열린 세계 고등학교 토론대회에서 한국팀은 3년 연속 16강에 올랐다. 세계속의 ‘토론 한국’의 위상을 떨치고 돌아온 학생들을 만나봤다.

“저희는 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정당당하게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16강전에서 패배한 요인에 대해 묻자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캐나다팀과 겨뤘던 마지막 토론에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수준은 비슷했다고 생각해요. 팀에 대한 심판의 선입견이 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아쉽죠.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니까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팀을 압도할 만큼 더 노력해야죠.”

5명의 학생들은 대표로 선발된 6월 말부터 본격적인 대회 준비에 돌입했다. 대회에서 다뤄야 할 8개 주제 중 미리 공개된 4개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각자 역할을 정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국내 대회에 참가해 실전 감각을 쌓기도 했다. 연습에 투자한 시간을 모두 합치면 100시간에 달한다.

방학 땐 국가대표팀 선배들이 찾아와 코치해 주기도 했다. 모두 하버드·컬럼비아대 등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이다. 차승민(17·서울국제학교11)양은 “토론 전문 코치와 쟁쟁한 선배들이 밀착지도를 해줘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권도형(17·대원외고2)군은 영어토론을 스포츠에 비유했다. “우리말 토론은 다소 딱딱하고 형식적인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영어토론은 좀더 전략적이죠. 감정적으로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 필요해요.” 논점 정리 방식, 반박 시점, 논증 순서 등 세부적인 전략에 따라 토론을 잘하고 못하고가 가려진다. 송유진(17·대원외고2)양은 “모순되지 않는 근거들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한다”며 “마케팅을 하듯 통일된 슬로건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토론은 크게 내용·스타일·전략 3가지로 평가된다. 한국팀은 내용면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학생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최근에는 토론 문화가 확산되면서 실력이 많이 향상됐다고. 다만 상대 주장을 비틀고 반박하는 기술과 유머 등 스타일·전략 부분이 다소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유민재(18·한국외대부고3)군은 “한국팀이 위상을 높이려면 정부나 학교의 도움도 필요한데, 현재는 지원이 많이 부족한 상태”라고 강조하며 “선진국처럼 토론에 강한 이들을 격려하며 자랑스러워하는 문화가 부럽다”고 털어놨다.

국제 토론대회인 만큼 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모두 수준급이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학생도 있다. 이런 실력도 하루 아침에 생기지는 않았다. 송양은 초등 4학년까지 미국에 살긴 했지만 귀국 후 영어로 말하는 법을 거의 잊어버렸다. 중3 때부터 토론 연습을 했는데 처음엔 2분도 채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2년 동안 송양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영어 토론대회에 무조건 출전했다. 대회 참가가 송양에겐 말하기 연습의 장이었던 것. 마침 송양에게 처음 토론을 가르쳐줬던 강사가 이번 세계대회에서 코치를 맡았는데, 2년 사이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단다.

권군은 초·중학교 때 캐나다에서 1년 7개월 정도 살았던 경험이 있다. 귀국을 앞두고 동네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면서 책을 헐값에 팔았는데, 권군은 책을 박스째로 사서 한국에 부쳤다. 책은 방 하나의 네 벽을 꽉 채웠다. 권군은 “그 속에서 틈틈이 영어로 된 책을 읽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유군도 초등 때 2년 6개월 정도 미국에서 거주했던 경험을 살려 꾸준히 일기를 써나갔다. 지금까지 8권 정도 모인 일기와 연설문 찾아 읽기가 유군의 영어 비법이다.

그러나 이들은 “토론에서는 오히려 쉬운 영어를 쓰는 연습을 한다”고 귀띔했다. 쉬운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영어 실력과 토론 실력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 영어 발음이나 유창함보다 중심 생각과 발상이 중요하다는 조언이었다. “세계대회를 통해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겸손함을 배웠다”는 그들. 연세대 국제학부에 합격한 유군을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내년 2월에 열릴 대회에 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토론의 매력에 푹 빠진걸까. 이들의 활약과 도전이 기대된다.

프리미엄 최은혜 기자
사진= 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그래픽= 프리미엄 이원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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