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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삼십육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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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른 여섯 가지의 계책을 일컫는 『삼십육계(三十六計)』는 중국의 병가(兵家)적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저작이다. 작자 미상에 편찬 연대가 불분명한 책이지만 『손자병법(孫子兵法)』 등 역대 병서(兵書)와 전쟁터에서 구사된 모략들이 망라돼 있다.

모략이란 꾀를 뜻한다. 자신의 힘을 덜 사용하면서 적을 제압하는 지모(智謀)의 세계다. 나와 남의 구분이 뚜렷하고 우군과 적군의 개념이 분명하다. 적과 싸움을 벌이는 데 있어서 운용해 볼 수 있는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삼십육계의 제1 계책은 ‘속여라’다. 이른바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瞞天過海)’다. 당(唐)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침략을 위해 나선 뒤 바닷길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을 때 부하들이 땅 위의 집처럼 꾸민 술자리를 배에다 차린 뒤 편안하게 바다를 건너게 했다는 내용의 고사가 그 뒤를 따른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황제, 즉 천자(天子)까지도 속일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남을 속이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하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줄행랑’이다. 첫 계책부터 구사하는 사기와 기만이 기대하는 대로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는 ‘튀는 게 최고’라는 얘기다.

병가는 중국이 자랑할 수 있는 독특한 사고 체계다.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에 앞서 병가가 먼저 생겼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원시 부족 형태의 인류는 고상한 사상에 앞서 먼저 남과 싸움을 벌였을 테니까 말이다.

언뜻 슬기로움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이런 사고 체계의 핵심은 사술(詐術)이다. 남을 제대로 속이는 기술의 축적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싸움에서는 남을 속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병불염사(兵不厭詐)라는 말이 전해진다.

중국의 멜라민 분유 파동을 지켜보면서 문득 떠올리는 사술과 기만의 삼십육계 식 병가적 사고다. 가짜가 줄을 잇는 중국과 그 병가적 전통이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중국만 탓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세계적 경제위기를 몰고 온 미국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 운영자들이 더 흉칙하다. 일반 대출자의 담보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파생상품을 만들어 그들의 돈만 우려먹었으니. 속여 먹고 튀는 재주에서 보면 그들이 부도덕과 사술, 기만의 진짜 계승자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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