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더 작은 것을 향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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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라가 두쪽으로 갈라설 것만 같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탄핵이 매듭 안되고, 새 국회도 출발 전이어서 과도적 평온일 수도 있다. 여당 일부에서 언론개혁이니 뭐니 하여 또다시 갈등을 부추기고 있지만 양당 대표회담 등을 볼 때 희망적이다. 여당이 실용주의 노선을 내세우고, 야당도 비슷하게 선진과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서로 "아니 그 노선은 우리 것인데, 그쪽이 그걸 주장하면 우리는 어떡하란 말이냐"고 말할 정도다.

정치가 안정되려면 경쟁 정당 간에 이념의 차이가 좁아야 한다. 양극단이 아니라 서로 비슷하게 중간에 위치해야 한다. 좌우의 끝으로 갈수록 지지층이 얇아지니 정상적인 생각을 한다면 당연히 국민이 많이 몰린 중간 쪽에 자신을 포진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서로 중간을 차지하려다 보니 정책이 거의 같아질 수밖에 없다.

*** 이념 차이 좁혀야 정치 안정

달라봐야 미세한 차이다. 이것이 선진형 안정화된 정치구도다.

이런 정치구도가 되려면 조건이 있다. 국가의 목표에 대해서는 정당 간 이견이 없어야 한다. 특히 국가의 생존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첨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북한 때문이었다. 한쪽은 적대적 위협세력으로, 다른 쪽은 공생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이번 선거결과를 본다면 후자의 견해가 이제는 다수가 되었다. 많은 보수층들은 "이러다가 북한에 나라가 먹히는 것 아닌가"라고 걱정했다. 그것이 진보 진영을 불신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용천 사고는 불행한 일이지만 북한에 대한 우리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사고현장의 소달구지, 남루한 차림의 북한 주민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우리를 무력으로 침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을 것이다. 북한돕기가 폭발한 것도 북을 경쟁 대상에서 이제는 도와주어야 할 상대로 인식이 바뀐 때문 아닐까. 물론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을 걱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부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보수 야당이 보안법 개정을 들고 나왔다. 오히려 이런 개방을 통해 우리 체제가 더 강건해질 수 있다. 핵 문제만 해결된다면 우리 정치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되던 북한 문제는 앞으로 영향을 잃어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는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정리할 일이 남아 있다. 미국 문제다. 미국의 위치는 북한 요소와 맞물려 있다.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으면 우리는 앞으로 매우 어려운 입장에 처할 수 있다. 당선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처럼 '여당은 중국'을, '야당은 미국'을 중시한다는 식으로 나라가 나뉘어 진다면 국내 정치는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사실 이런 식의 구분 자체가 바보들의 짓이다. '너는 미국파, 나는 중국파'로 대결한다면 결국 100년 전 나라 망하던 꼴을 똑같이 겪을지 모른다. 미국이 빠져나가 힘의 공백이 된다면 한국은 중국의 변방 대접도 못 받을 때가 올 수 있다. 북핵도 미국없이는 해결이 어렵다. 우리 국가이익에 해가 될 일 없는 미국을 왜 내쫓지 못해 안달인가. 미국 때문에 못한 일이 무엇인가. 그렇다고 경제.군사 대국화하는 중국과 구태여 나쁘게 지낼 이유 또한 없다.

*** '美 우선 - 中 우선' 논란 무의미

선진형 안정된 정치를 만드는 또 하나의 조건은 정치를 실용화하는 일이다. 관념정치.거대 담론의 정치에서 탈피하는 일이다. 우리는 민주화니,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거대한 주제에만 익숙해 있다. 특히 민주 대 반민주라는 선악의 개념이 우리 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양쪽이 다 선이고, 지나치면 다 악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선악이 아니고 비율이다. 따라서 양당이 중간을 향해 경쟁한다는 것은 이 비율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다.

비율의 문제라면 목소리가 커질 이유가 없다. 분노하고 흥분할 일도 아니며, 죽고 살기를 할 일도 아니다. 한쪽은 정의의 정당이고, 한쪽은 없어져야 할 정당도 아니다. 단지 작은 부분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사람들은 정당의 미세한 차이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정당들도 더 전문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거창한 개념들은 사라지고 주변 실생활과 연결된 작은 일에 관심이 모아져야만 한다. 진보니 보수니 먼저 자리를 정하고, 그 잣대에 맞추어 해답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문창극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