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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빛 설렁탕에 담긴 깔끔한 맛에 놀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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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과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 두 곳의 주방을 총괄하는 총주방이사 폴 솅크(36)는 서양 음식을 전공한 호주 출신 요리사.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그는 한국 음식에 푹 빠져 버렸다. 금발의 요리사를 사로잡은 한국 음식은 무엇이고 ‘한국 음식의 세계화’를 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메인 주방, 분주히 움직이는 요리사들 사이에 선 폴 솅크 주방이사


한국 음식에 대한 첫인상은 무엇이었나?
한국에 와서 한국 음식을 처음 먹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정식 백반이다. 김치찌개를 중심에 놓고 반찬이 여러 개 식탁 위에 올랐는데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눈과 머리가 핑핑 돌았다. 대부분의 음식에 고추장·고춧가루·마늘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독특했다. 처음부터 무엇을 꼭 먹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한국 음식에 대해 워낙 몰랐으니까. 대신 무엇을 먹든 제대로 먹어 보고 싶었다. 어떤 재료를 이용해 어떻게 요리한 것인지. 추어탕을 먹었을 때, 미꾸라지를 통째로 갈아 들깨를 함께 넣고 끓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신기했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한국 음식은 무엇인가?
설렁탕이다. ‘식사를 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같이 맛봤는가, 이런 총체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상황을 만들어야 진짜 좋은 음식 경험인데 설렁탕이 내게는 그렇다. 밖은 얼어 죽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후끈후끈한 온돌방 안에 들어가자 따뜻한 국물이 나오는데 크림처럼 하얗더라. ‘맛이 상당히 진하겠는걸’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주 부드러웠다.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국물 음식이었지만 당시의 날씨 상황, 함께 있었던 동료들 덕분에 더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서양에도 설렁탕 같은 육수 요리가 있지 않나?
서양에도 꼬리 수프라는 게 있다. 그렇지만 국물이 갈색이다. 왜냐하면 뼈를 한 번 구운 뒤 국물을 우려내니까. 그런데 한국의 설렁탕은 바로 뼈를 솥에 넣고 끓인다는 게 신기했다. 컬러가 그렇게 맑고 하얗게 나오는 것도 놀랍고. 똑같은 재료인데 테크닉을 다르게 해서 조리하는 대표적인 예다.

지난 4년 동안 한국 음식을 맛보기 위해 ‘맛 기행’을 다녔다고 들었다.
호텔 내 사무실 벽에 전국지도가 걸려 있다. 주방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물어 전국의 특산물을 먹으러 돌아다닌 기록이 그 지도에 빽빽하게 붙어 있다. 음식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고. 현재 한국에 와 있는 어떤 외국인보다 한국 음식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식당과 음식 목록은 어떻게 선택하나?
매주 휴일이면 한국 식당을 찾는다. 주방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추천받은 곳을 우선 찾아가기도 하지만 지하철에서 아무 정거장에나 내린 다음 출구에서 눈에 띈 첫 번째 식당에 들어가는 방법도 즐긴다.

개인적으로는 재밌고 흥미로운 방법이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걱정도 된다. 맛없는 음식을 먹게 될까 봐.
운 좋게도 실패한 경험이 별로 없다. 같은 메뉴라도 식당마다 모두 다른 특징이 있다는 걸 경험하는 게 더 재미있다. 현지인들에게 묻기도 한다. 얼마 전 갔던 속초에서는 펜션 아주머니께 “주변에 맛집이 있느냐”고 물어서 식당을 찾아갔다. 오징어순대를 파는 집이었다.

맛 기행은 누구와 함께 다니나?
주로 혼자 다닌다. 한국에 아내와 두 아이가 함께 있지만 가족들은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 남자들 중에도 주말을 혼자 즐기는 낚시광은 아내에게 미움 받는다.
다행히 내가 요리사라는 점을 아내가 이해해 준다. 가족이 함께 갈 때도 있고.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하는 아홉 살짜리 딸은 모험을 좋아한다. 며칠 전에는 주방 직원 중 한 명이 집에서 새우양식장을 한다고 해서 가족이 함께 다녀왔다. 뜨거운 프라이팬에 소금을 깔고 새우를 올려놓은 뒤 투명한 뚜껑을 덮자 새우가 곧 빨갛게 변하면서 춤을 추더라. 흥미로웠다.

한국 음식을 세계화하는 데 고추장·마늘 같은 강한 양념들이 걸림돌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재료들을 빼고 맛을 개량한다면 그건 이미 한국 음식이 아니다. 개인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한국 음식의 세계화’는 시간문제라고 본다. 강한 향의 고수 잎을 주로 사용하는 태국 음식도 이미 세계인의 미각을 사로잡았다. 작더라도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계기만 있다면 한국 음식은 세계인의 보물 상자로 떠오를 거다. 한국은 음식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지만 그 맛을 내는 데 들어가는 재료들은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고. 그러니까 일단 소개만 되면 아주 친숙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 음식은 ‘건강 음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 이 점을 잘 이용하면 충분히 세계화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나의 아쉬움은 다양한 식자재를 생산할 수 있는 기후와 환경을 갖고 있는데도 개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러플(송로버섯)·연어 등등. 굴만 해도 좋은 양질의 것을 한국에서 봤는데 이것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유통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한국 음식 가운데 ‘이것만은 도저히 먹을 수 없더라’ 하는 것이 있었다면?
홍어회는 삼합 등을 포함해 10번쯤 먹어 봤다. 점점 더 익숙해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맛있게 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포기하진 않을 거다. 나는 세발낙지·과메기도 좋아하고, 개고기도 먹어 봤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 앞에 놓인 음식인데 못 먹어 본 게 딱 하나 있다. 말복에 족구 시합을 하고 개고기를 먹으러 갔는데, 나무도마 위에 개의 척추 뼈가 그대로 올라왔고 거기에 생식기(속칭 '만년필')가 달려 있었다. 한 마리에 하나뿐인 것이니 특별히 나에게 먹으라고 하는데 그것만은 도저히 못 먹겠더라.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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