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독하게 시키고 내무생활은 확 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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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20면

포사격 훈련에서 과녁을 명중시킨 병사를 여운태 대대장이 칭찬하고 있다. 홍천=최정동 기자

체감 온도 영하 20도쯤 되는 2008년 1월. 강원도 홍천강 기슭에서 3기갑여단의 혹한기 전술 훈련이 시작됐다. 90대대의 3개 중대는 공격·방어 훈련을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병사들은 보초를 남기고 텐트에서 곯아떨어졌다.첫날 새벽 네 시 대대장은 집결지 이동 명령을 내렸다. 짙은 어둠과 살을 에는 강바람. 졸린 눈을 비벼 가며 병사들은 짐을 꾸리고 텐트를 접어 20여㎞를 이동해 새 숙영지를 만들었다. 날이 샌 뒤 훈련은 다시 시작됐다.

소통과 스킨십 기계화 대대장 여운태 중령

다음날 새벽 대대장은 또 이동 지시를 했다. 차가운 어둠 속에서 흰 입김을 토해 가며 장갑차에 장비와 짐을 싣고 부대는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집결지 편성 훈련이다. 일주일 훈련 동안 거의 매일 그랬다.병사들은 들들 볶였다. 여 대대장은 “강도를 약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안 그랬다”고 했다. 전반기 1, 4, 6월의 야전 훈련을 비롯해 모든 훈련에서 이를 악물고 독하게 시킨다고 한다. 요즘 병사가 그런 긴장을 견딜까. 병사들의 불만은 얼굴 표정에 나타날 것이다. 과연 어떨까.

취재 첫날인 18일 오후 6시쯤. 대대 공간에 ‘SG 워너비’의 ‘라라라’가 대대장실 인근의 당구장에서 울려 퍼진다. 병사들은 농구나 배드민턴, 축구를 한다. 경례를 적당히 해도 대대장은 군기를 ‘독하게’ 의식하는 것 같지 않다.그날 오후 10시 반쯤. 캄캄해야 할 1·2중대 내무반 건물의 중간이 밝다. 독서실이다. 50여 명의 병사·하사관이 사법고시 준비, 토익 공부, 김훈의 '남한산성'독서, 주특기 공부에 열중해 있다. 대대장 지시로 오후 11시까지 개방된다.

1 인기 폭발 중인 대대 축구 수퍼리그의 한 경기에서 여 대대장(회색옷)이 헤딩하고 있다. 18일 시합에서 그는 한 골을 어시스트 했다. 2‘꿈을 꾸라’고 만들어준 대대 월간 신문 39태극 두드림393.태극 대대가 좋다’며 동생을 자기 부대로 입대시킨 형 김태형 상병(왼쪽)이 동생 정우(일병)를 안고 있다.

규정에 따라 널찍해진 내무반과 2층 침대. 중대 건물마다 공중전화기와 카드식 전화가 있다. 좌변기 일색의 화장실엔 비데도 있고 칸막이마다 소원 수리함과 볼펜이 붙어 있다. 여 대대장은 한 걸음 더 나갔다. 당구장에 ‘이병의 시간’이란 것을 정했다. 토요일 오후 1~3시 사이 고참은 출입 금지. 이병만 된다. 내무반 자체 벽보도 허용했다. 반라의 젊은 여성이 몸을 꼬며 웃고 있는 벽보엔 젊음이 꿈틀댄다. 이진범 병장은 “기숙사 같은 분위기”라고 한다. 배려의 리더십이다.

‘태극 두 드림’이란 대대 월간지는 대대장이 출범시켰다. ‘do dream, 꿈을 꾸라’는 뜻이다. 중대까지 기자를 ‘파견’하는 8쪽짜리 신문은 소통의 장이다. ‘태극 피플’에서는 사병 기자가 ‘감히’ 장교와 하사관을 인터뷰한다. ‘그 Go참 vs 그 Who임’ 코너는 제목이 말장난 같아도 내용은 예리한 칼이다.

2008년 7월 1일자 ‘유격 훈련’편의 파트 1에는 ‘한심하게 훈련받는 후임에 대한 고참의 불만’을, 파트 2엔 ‘한심한 고참에 대한 후임의 불만’을 유머러스하게 썼다. 자연스러운 소통으로 문제를 걸러 내는 리더십이다. 이쯤에서 물어봤다.

-군인데 자유가 넘쳐 보인다.
“잘해 줘야 강한 훈련을 요구할 수 있다. 자율성이 효과를 낸다. 복무 의욕 고취, 긍정적 마인드, 시간의 선용이다.”

-군기는 안 잡나.
“필요 이상의 고통을 왜 주나. 무조건 강압하면 안 된다. 피동적 집단인 사병들이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게 더 낫다.”

올해 전반기, 여단은 최정예 전투원 19명에게 특급전투원 금장을 수여했다. 그중 12명이 태극 대대 병사(11명)·하사관이다. 사격·체력·행군·주특기 시험 등에서 최고가 받는다. 부상은 4박5일 휴가 정도. 병사들은 명예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 대대장은 “자율과 의미 있는 일을 강조해 온 지휘의 결과”라고 했다.

여단의 다른 고위 간부는 ‘병사 40%가 내무반 공동생활에 기겁하는 외아들이고 개인주의 문제가 심한 병사가 많은’ 현실에서 대대 사병 400명의 전투 태세를 확립하려면 세심한 관리는 필수라고 했다. 인터넷 세상에서 군은 유리 어항 속에 있는 존재다. 일방적 리더십을 상징하는 ‘SSKK, 즉 시키면(S) 시키는(S) 대로 까라면(K) 까는(K)’ 같은 구시대적 용어가 발붙일 곳이 없어진 것이다.

‘마음의 편지’와 ‘태극 간담회’는 여 대대장과 병사의 소통로다. 무기명으로 적어 내면 대대장이 간담회에서 직접 답한다. 최근 편지엔 ‘안개 낀 날 구보하면 건강 상한다’ ‘체력단련장에 오디오를 설치해 달라’ ‘샤워장에 더운 물을 더 달라’ 같은 내용이 담겼다.

‘군기 빠진’ 요구라고 치워 버릴 수도 있지만 여 대대장은 그러지 않았다. 구보 문제는 군의관을 시켜 “건강에 지장 없다”고 설명했다. 오디오는 13만원을 들여 설치해 줬다. 더운 물은 ‘젊으니까 좀 참으라’고 했다. 촛불시위 때는 “쇠고기를 못 먹겠다”는 불만이 나와 “군은 한우 고기만 쓴다”고 설명했다. ‘화장실 통신’도 있다. 화장실에 설치된 함에 편지를 넣으면 대대장만 본다. 여 대대장은 “악용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소통은 중요하다”고 했다.

스킨십은 양념이다. 이병 전입신고도 대대장실에서 직접 받는다. 휴대전화가 적힌 명함을 주며 “부대 계통을 밟아도 해결 안 되는 일은 연락하라”고 다독인다. 디테일에 끝없이 배려하는 대대장이 피곤해 보인다. 그는 “대대장은 등이 휠 만큼 짐을 진 현장 책임자”라고 했다.

문제 병사 관리도 대대장 몫이다. 취재 당일 오후 3시 반, 대대장실에서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병사’ 점검회의가 열렸다. 도벽, 자살 가능성, 신경증 등 문제는 다양했다. 지능지수(IQ)가 70 언저리인 병사도 있다. 대대의 한 장교는 “병사의 15%쯤이 관리 대상”이라고 한다. ABC급으로 나눠 심각한 A급 10여 명은 대대장이 직접 관리한다.

여 대대장판 소프트 리더십의 뿌리는 어디일까. 그는 1996년 중대장 이후 10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으니 신병영 리더십을 겪을 기회는 없었다. 2005년 세워진 육군 리더십 학교에서 대대장을 위해 2박3일 파견교육을 해 줬지만 영향을 받지 않았다. 취재가 끝날 즈음 물었다.

-왜 소프트 리더십인가.
“전투력 목표 달성을 향해 가는데 잘하는 병사는 20% 정도다. 신체적·지적으로 도저히 못 따라가는 병사도 있다. 소위 고문관들이다. 대대장은 이들 모두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강압적으로 할 수 있는 시대는 갔다. 그래서 병과 늘 함께하는 것이다.”

그는 ‘Book smart 보다 Street smart’라고 했다. 서류(book)보다 현장(street)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또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도 말했다. ‘위아래가 하나 되면 이긴다’. 손자병법 모공편에 나온다.
보충 취재를 위해 25일 통화하는데 대대장이 숨차 보인다. 40㎞ 야간 행군에 같이 걷기 때문이다. “대대장인데 차를 타시지”라고 하자 “같이해야죠”라고 한다. 확실히 그의 소프트 리더십은 이전 세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병과 함께하는 동참의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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