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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미국 CIA, 믿을곳 못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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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잿더미의 유산』의 저자 팀 와이너는 “CIA 연대기는 한 순간의 덧없는 성공과 오랜 세월 지속되는 실패로 점철돼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수년간 CIA 전·현직 국장 10명과 요원 300여 명을 인터뷰했다. [중앙포토]

잿더미의 유산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1000쪽, 3만5000원

 모든 과거사는 논쟁거리다. 새로운 역사적 발견은 애써 만들어 놓은 역사관을 흔들어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교적 신흥국가인 미국의 번영과 패권이 20세기에 이뤄진 데에는 분명 어떤 필연성이 작용했다고 믿는다.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어떤 힘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 엄청난 제국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책은 미국의 어떤 실패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지극히 야만적인 그 무엇이 2차대전 말기부터 미국의 최고위층을 실패로 몰아넣었다. 또 이 괴물은 한국전쟁으로부터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국인과 그 밖의 나라들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다름 아닌 미 중앙정보국(CIA)이다.

뉴욕타임스 기자인 저자는 20여년간 미국의 정보기관을 연구해왔다. 이 책은 CIA가 냉전의 발상지인 2차 대전, 그리고 한국전쟁으로부터 유럽·중동·남미·아시아에서 어떻게 ‘정보의 실패’를 겪어왔는지를 방대하고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일례로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은 절대 없다는 결정적 오판은 잘 조작된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울에서 CIA지부장과 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는 “미국 첩보 역사에서 북한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실패 사례”라고 말한다. 북한에 대해 무지한 CIA 지도부는 명확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상상력에 의존해 멋대로 북한을 가공해왔다. 북핵문제로 인한 위기 때도 CIA는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저자는 CIA의 실패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비극에 접근하는지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제2의 한국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정보의 실패는 베트남에서, 이란에서 계속 반복되었고 냉전이 종식되는 그 순간에도 습관처럼 나타났다. 왜 CIA의 정보는 계속 실패하는가. 저자는 10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저서 어디에서도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지는 않다.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CIA가 정말로 무지했다는 것은 분명히 보여준다. CIA는 그 지식의 공백에서 조직의 이익을 도모하고 성공을 과장하고 싶은 유혹의 초대장이 날라 오자 조작·과장·오판으로 순순히 응한다. 이것은 정보의 독특한 생리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불치의 습관은 베트남·이란·쿠바·칠레에서도 교정되지 않다가 9·11을 치루고 나서야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맡게 된다. 60년 역사의 CIA는 2류 조직으로 밀려난 것이다.

9·11 이후 세계 선진국의 정보기관들은 무수한 쪼가리 정보를 하나로 융합시키는 새로운 컨트롤타워, 새로운 체계를 갖추는 중이다. 격변의 세계를 예고하는 미세한 첩보는 항상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종합하는 방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CIA가 ‘있어서’가 아니라 CIA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제국이다.

한국의 비대화된 정보인력과 기구들은 미국의 CIA 정보에 대한 맹신이 가장 심한 상태다. 우리도 역시 비정상적으로 팽창한 정보기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해왔다. 북한을 잘 아는 당사자는 한국임에도 미국 정보기관에 의존했던 것이다. 이런 정보종속의 실상이 더욱 낯뜨겁게 다가온다.

원제 『Legacy of Ashes』.

김종대<군사전문 월간지 ‘디앤디 포커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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