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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관계 협력적”

중앙일보

입력

“이승만(1875~1965)과 김구(1876~1949)는 협조적이고 쌍두마차 같은 관계였다. 흔히 생각하듯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었다. 한국 민족주의의 두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과 김구-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나남)를 최근 출간한 원로 언론인 손세일(73·사진)씨는 “두 인물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은 이 나라의 국가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전 10권으로 기획된 대작이다. 두 인물의 탄생부터 3·1 운동까지를 다룬 1부 세 권이 먼저 출간됐다. 이승만과 김구, 두 명의 역사적 거목을 사다리 삼아 한국 근대사부터 대한민국의 건국까지를 차근차근 짚어 올라갈 저작이다. 22일 저자를 만나 대한민국 건국 60년에 다시 돌아보는 김구와 이승만의 의미를 물었다.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60년이다. 내년은 김구 서거 60년도 된다. 해방과 건국 과정에서 두 인물의 엇갈린 생애 때문에 두 사람을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두 사람은 한국 민족주의의 두 봉우리다. 이 두 봉우리에 올라서야 한국의 미래가 보인다. 해방 이후 추종자들에 의해 정치적 라이벌 관계로 부각됐을 뿐, 두 사람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줄곧 협력적 관계였다. 두 인물의 차이라면 같은 민족주의 안에서 이승만은 건국을, 김구는 민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남북 관계에 대한 두 인물의 견해차가 크게 부각되기도 하는데.

1946년 민주의원 회의를 마치고 나란히 선 이승만(右)과 김구.

“해방 정국에서 분단국가 수립은 옛 소련이 먼저 의도했다. 김구가 38선을 넘으려 했을 때 이승만은 ‘담판한다면 스탈린과 해야지 김일성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입장이었다. 김구는 그래도 이야기는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를 대단한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볼 수는 없다.”

-1부에선 이승만의 ‘왕족 의식’과 김구의 ‘상놈 콤플렉스’를 대비했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후손이라는 왕족 의식이 강했고, 김구는 성장기에 마을 양반들로부터 수모를 당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었다. 이런 심리적 배경 하에서 이승만의 과감한 리더십을 이해할 수 있다. 김구의 ‘상놈 콤플렉스’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의견 취합형 리더십으로 승화된다. 자신의 약점을 정치적 덕목으로 만든 것이다. 개성과 리더십의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유년시절 궁핍한 가정 환경과 청년 시절 5년이 넘는 감옥생활 속에서도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했던 인물들이다.”

- 한국 근·현대사를 잇는 대작을 집필한 동기는.

“민족주의는 내 평생의 연구 과제다. 방법론적으로는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을 융합하고 싶었다. 저널리스트로서 학계가 주의 깊게 다루지 않고 넘어간 부분을 꼼꼼히 짚으려 했다.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는 저널리즘 정신을 최우선으로 한 것이다. 김구가 젊은 시절 참여했던 동학 농민봉기에 대한 접근도 그렇다.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스나이더 소총의 최대 사정거리는 1800미터였지만 동학 농민군이 지닌 화승총의 사정거리는 100보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 등 구체적인 사실을 최대한 발굴했다.”

-그간 두 사람을 다룬 연구에서 아쉬운 점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에 의해 두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목표를 당대에 이뤘느냐로 이들의 성공·실패를 말할 수 없다. 긴 안목에서 두 인물의 사상을 평가해야 한다. 또 독립운동사에서 임시정부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임시정부는 조세권·검찰권 등 현실적 권력의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행위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반역 행위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대두될 경우 폭력 등의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문제를 터부시하는 것 같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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