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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IT 키드'기술로 미국 시장 도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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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25면

이성안 엑스컴 사장이 11년간 개발에 몰두한 전력선 통신 모뎀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18일 경기도 일산의 한 오피스텔. ‘전력선 통신(PLC·Power Line Communication)’ 기술 개발회사인 엑스컴의 이성안(48) 사장은 수인사를 하자마자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경기도 연천에 있는 이 회사 연구소의 이윤호(29) 소장이 보였다. 동영상을 보면서 채팅창을 통해 이 소장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컴퓨터 본체에 연결된 선은 전력선뿐이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인터넷 전용선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선 인터넷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컴퓨터 옆에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해 설치한 모뎀이 눈에 띌 뿐이다. 일반 전력선에 고주파 통신신호(수백㎑)를 실어 전송하는 PLC 기술 덕분이다.

전력선 통신 꿈 키우는 이성안 엑스컴 사장

이 사장은 “일산에서 연천까지 50㎞가 넘는 거리인데 자체 개발한 ‘XPnet’ 기술로 전기선을 이용해 끊김 없이 인터넷 통신을 즐길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 회사가 개발한 XPnet 칩과 20~50달러(약 2만2000~5만5000원)짜리 모뎀만 설치하면 전기선으로 원거리 통신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전원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기만 하면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PLC 시대가 열릴 것인가. PLC 기술을 이용하면 별도의 통신망을 깔지 않아도 기존 전기선을 이용해 인터넷·원격검침·홈오토메이션 등을 하는 게 가능해진다. 전국 곳곳에 전기가 안 들어간 곳이 없으니 별도 투자 없이 ‘국토의 정보기술(IT) 신경망’을 얻는 셈이다. 이 사장은 이 기술 개발을 위해 11년간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왔다.

엑스컴은 최근 XPnet 성능 시연에 성공했다. 시연 행사는 일산 본사와 연천 연구소 구간에서 이뤄졌다. 기술 검증을 담당한 제어계측 업체 JDSU코리아는 통신 장애가 전혀 없었다고 확인했다. PLC를 가능케 하려면 변압기 우회장치와 신호 증폭기를 달아야 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는 게 이제까지의 통념이었다. 하지만 XPnet은 별도 장치를 설치하지 않고도 왜곡 없이 통신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실제 이번 시연에서 통신신호가 일산~연천에 있는 300개가량의 변압기를 무사 통과했다.

JDSU코리아 오석호 책임연구원은 “XPnet 시연 결과는 기존 이론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전문가들로선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며 “다만 이번 시연은 일대일 통신이어서 수많은 사람이 동시다발로 접속했을 때도 문제가 없을지는 추가 검증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국민대 김기두(전자공학) 교수도 “시연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일정 구역, 일정 조건에서 PLC에 성공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며 “100번 중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통신으로서 상품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만큼 안정성 확보가 상용화의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PLC 기술이 상용화되면 파급 효과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전력의 경우 각 수요처의 전기 사용량뿐만 아니라 가스·수도 사용량 등을 원격 검침하는 사업을 추진 중인데 이 시장 규모만도 연간 7000억원대에 이른다. 이 사장은 XPnet 기술을 적용하면 별도로 원격검침망을 깔지 않아도 기존 전기선으로 사업을 하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각종 홈네트워크 기기에 적용하는 게 가능하다. 업계에선 세계 홈네트워크 기기 시장이 2017년께 36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통신망이 아직 깔리지 않은 나라에 기술을 수출하는 효과도 기대된다. 통신망이 열악한 중국과 서남아·중남미는 물론이고, 영토가 광대한 미국이나 호주 등이 매력적인 시장이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정부와 관련 업계는 10여 년 전부터 PLC 기술 개발에 공을 들여왔다. 그러나 변압기가 장벽이었다. 통신신호가 변압기를 통과하면 왜곡되거나 끊기는 바람에 집 안에서나 사용하는 ‘반 쪽짜리 통신선’에 머물러 왔던 것. 이를 극복하려면 변전소마다 ‘커플러’라는 우회장치를 설치하고 수백m마다 증폭기(리피터)를 달아야 했다. 2010년까지 200만 가구 상용화를 목표로 미국 텍사스에서 PLC망을 구축하고 있는 커런트커뮤니케이션은 우회장치·증폭기 구입 비용으로 3억 달러(약 3300억원)를 쓸 예정이다.

이 사장은 “XPnet은 별도 장치 없이 고압 전력선망까지 통신선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기술”이라며 “구현 가능한 데이터 전송 속도는 최대 100Mbps로 초고속 인터넷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개발된 PLC 기술이 옥내를 중심으로 1∼2Mbps급 전송 속도를 제공하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속도다.

이 사장이 PLC 기술 개발에 나선 것은 1997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개인 사업을 하던 그에게 한 젊은이가 생뚱맞은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지금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윤호씨였다. 이 사장은 “전력선으로 인터넷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이 소장의 말을 듣고 선뜻 손을 잡았다.

이 소장은 전형적인 ‘용산 IT 키드’다. 컴퓨터에 반해 초등학생 때부터 용산 전자상가를 기웃거리던 그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열여덟이라고 나이를 속여 컴퓨터 수리원으로 취직한 것. PLC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값비싼 통신요금 때문이었다. 그는 천리안이나 하이텔로 컴퓨터 통신을 하던 시절, 한 달 전화요금이 수십만원이 나와 집에서 크게 야단을 맞자 값싸게 통신을 할 수 방법 찾기에 골몰했다. 그러다가 군용 전화에서 힌트를 얻었다. 군인이 전력선으로 간단한 음성통신을 하는 것에 착안해 ‘전력선으로 컴퓨터 통신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품게 됐다.

지난 11년간 매출이 ‘0원’인 이 회사가 연구개발에 투입한 돈은 100억원이 넘는다. 이 사장은 “1000명의 소액 투자자를 유치했지만 개발비가 모자라 사재를 털어넣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졸 엔지니어’가 개발한 기술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를 찾아 다니면서 기술 검증을 부탁했지만 “불가능한 기술이다” “이론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며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엑스컴은 XPnet 기술을 곧 미국 시장에 선보인다. 이 사장은 “다음달 초 휴스턴에서 시연할 예정인데 성공하면 미국 대형 전력회사로부터 300억원대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양해각서(MOU) 조항 때문에 구체적인 회사명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이 사장은 “지금도 학계나 업계에서 외면받기는 마찬가지다. 미국행을 택한 것도 이런 이유다. 시장도 크지만 그들이 우리 실력을 100% 믿어주기 때문이다. 박사들과 이론 싸움을 벌이느니 시장을 개척해 결과로 보여주겠다”며 성공을 장담했다.
엑스컴은 얼마 전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을 영입했다. 이 사장이 투자 유치를 위해 몇 해 전 이 전 회장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됐다. 이 회장은 “하늘 아래 이런 기술이 없다.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며 XPnet 상용화에 적극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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