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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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니,오히려 「결혼」이 더욱 분명해지고 말았다.
남편은 모자(母子)가 다녀간 며칠 후 호적에 「김대기(金大起)」를 을희와의 사이에 낳은 장남으로 입적했기 때문이다.
자기 핏줄 찾겠다는 행위를 마다할 수는 없었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호적을 마련해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김대기는 이래서 을희의 장남이 됐고,을희는 두 장남을 갖게 되었다.하나는 자기가 낳은 첫 남편의 큰아들,또 하나는 남이 낳은 둘째 남편의 큰 아들….이렇게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전쟁 탓이었다.
전쟁이 나지 않았던들 을희의 첫 남편이 전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을희가 재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또 그 여인의 남편이남북의 대치 속에 산중에 갇혀 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대기 아버지를 만나 대기를 임신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 다.
「역사」를 가정법(假定法)으로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긴해도 을희는 『만약…』운운하는 가정법을 써서라도 전쟁이 없었으면 다복했을 자기 처지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부대 군납업자와 불하업자를 겸하게 된 남편은 믿을 수 없을만큼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배부른 마대 여러 덩어리가 집안으로 실려 들어왔다.
돈이었다.
다발다발 묶인 돈이 많았지만 더러는 낱장짜리가 마구 눌린채 뭉쳐 들어있기도 했다.
그처럼 많은 현금을 대하기는 생전 처음이었다.간담이 서늘해지는 두려움으로 다리가 떨렸다.
돈 자루를 안방에 쌓은 채 그 옆에서 잤다.남편은 베갯머리 밑에 권총을 끼워넣고 나서 태연히 을희 육신을 더듬었다.그 무딘 신경에 소름이 끼쳤다.
돈 자루는 이튿날 은행으로 실려갔고 모인 목돈으로 남편은 땅을 사기 시작했다.그 땅 중에는 방금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선 가까운 데가 많았고 가시덤불 투성이의 바닷가 모래벌판도 있었다.거의 공짜에 가까운 헐값이었다.남편은 그 헐 값을 땅 주인에게 특별한 시혜(施惠)라도 베풀 듯이 건네며 땅 문서를 받았다.피란살이에 쪼들리고 있던 땅 임자들에겐 뜻밖의 횡재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돈 자루와 더불어 사람들의 출입도 찾아졌다.주로 미군 장교였다.이들을 위해 남편은 주말마다 댄스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열리기 전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모여들었다.사교춤의 파트너로 불려온 기생이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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