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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휴가문화.여행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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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태국에서 보내온 잘린 곰발바닥 사진이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이제는 먹을 줄도,놀 줄도 모르는 민족이 되었는가 싶다.유럽의어느 관광지에서 성(城)을 관광하면서 『이거 사버려』하면서 킬킬거리던 일본인 단체관광객의 몰상식에 비하면,그 래도 겨우 곰발바닥인데 하면서 자위라도 해야 할까.
해외여행에서 한국인이 보이는 추한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유럽에 내린 첫날부터 호텔방에서 등산버너를 꺼내놓고 라면을 끓여대던 일은 이미 고전이 되었다.호텔 룸 미니바에 있는술을 마시고는 거기에 다시 물을 채워 놓음으로 해서 한국인이 투숙하면 그 방의 미니바를 자물쇠로 잠그는 호텔이 유럽에서 늘어나고 있다.
그런 어른 밑에서 자란 젊은이들이니 배운게 있을리 없다.배낭여행을 떠난 대학생들이 숙소의 귀환시간조차 안 지키고 담을 넘어 들어오니 한국학생을 받지 않는 유스호스텔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의 여행에는 무엇보다 테마가 없다.무엇을 만나보기 위해 간다는 뜻이 없다.그냥 간다.남이 간다니까 가고,남이 좋다니까가고,놀러 안 가면 안 되는 것 같아 간다.성지순례나 최근 선보이기 시작한 음악회 투어정도가 테마가 있을까.
단체여행이면서도 주제가 없다.
먹고 사진찍고 물건 사는게 전부인 여행을 떠나니 현지에서 지도를 들고 다니는게 아니라 한국과 비교하는 잣대를 들고 몰려다닌다.그 나라가 못 살면 못 살아서 경멸하고,잘 살면 잘 살아서 열등감에 빠진다.인도에 가면 『이 나라도 군사 독재 좀 해야겠어』하며 정치평론에 열을 올린다.유럽의 대리석 조각을 만나고는 『석굴암,그거 참 별거 아니로구만』하고 우리의 화강암 석조물을 비하(卑下)한다.
어쩌면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관광여행이란 여행의 본질과는거리가 먼,통조림된 여행인지도 모른다.단체 관광여행이란 나그네길의 설레임과 고난이 살아 숨쉬는 생선이 아니라 밀폐된 용기에방부처리된 통조림이다.그렇게 볼 때 거기에서 어떤 여행의 본질적인 기쁨이나 의미를 찾는다는 것부터가 덧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집을 나서면 모든 곳이 정처없는 타향이었던 민족이어서라고 체념할 수도 있다.집 밖에서 죽으면 객사(客死)라고 해서 집안으로 들이지도 않았던 것이 우리의 풍습.나그네는 그렇게 불행한자의 상징이었다.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놀이문화에 둔감했던 민족인가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적어도 이 땅에 살았던 어른들은 풍광이 좋은 곳을 일러 세가지로 나누었다.이 세상의 절경(絶景)에는 살만한 곳이 있고,볼만한 곳이 있고,그릴만한 곳이 있다고.관광이란 이 가운데 볼만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그러나 요즘의 세태는 갈 줄만 모르는게 아니라(여행),놀줄도 모른다(여가).야유회를 가도,단합대회를 해도 그렇다.끝에 가서 싸움이 나도록 놀아야 직성이 풀린다. 무엇이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가는 것일까.공복감(空腹感).우리 모두를 짓누르고 있는 이 사회적 공복감이 편집적(偏執的)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싶다.저축.검약이라는 말이 그토록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 일상의 이 허탈 감도 해외에서 과다(過多)쇼핑에 나서게 하는 심리적 요인은 아닐까.
국내여행에서부터 여가문화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방학때면 일본의 철도회사는 젊은이들을 위해 「청춘차표」라는 값싼 승차권을 판다.인도의 「디스커버리 오브 인디아」도 그렇다.값싼 이 티켓 하나면 같은 노선을 두번 타지 않는 한 얼마든지 어디든지 인도항공을 타고 인도 전역을 여행할 수 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여행의 본질을 위한 침목(枕木)을 깔 생각은 않고,내놓는 것이라고는 「출국세」 따위밖에 없는데 여행문화가 자리잡을 터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한수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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