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심의부터개혁하자>8.끝.決算안하는 예결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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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역대 국회에서 예산안이 예결위에 가장 길게 머물렀던 해는 91년이다.당시 예결위는 90년도 결산과 함께 27조1천8백억원에 달하는 92년도 예산안을 25일동안 다뤄 역대 최장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때도 19조원에 이르는 결산액은 단 4일밖에다뤄지지 않았다.결산만큼은 여전히 초특급처리였던 것이다.
예결위를 경험한 의원들이 흔히 토로하는 말이 있다.
『결산만 제대로 한다면 정부가 국회 무서운 줄 알게 될 것이다.』 정부가 한햇동안 쓴 돈의 내용을 국회에서 일일이 감시하고 그 결과를 추궁하면 정부도 꼼짝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그러나 이 당연한 원론이 이상하게도 실제 예결위활동에 들어갔을 때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 국회에서 결산심사는 요식행위로 전락한지 오래다.
지난해 11월1일 94년 세입세출 결산안이 상정된 국회예결위전체회의.
『오늘은 12.12와 5.17의 주역인 전직대통령 노태우(盧泰愚)씨가 단군 이래 최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날이다.본 위원은 이 시점에서 盧씨와 3당합당을 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92년 대통령 선거비용을 공개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국민회의 崔在昇의원) 예결위의 첫 사흘동안 질의에 나선 15명의 의원들은 대부분이 崔의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결산과 관련한 정부측의 답변도 의원들의 질의에 맞춘 부창부수(夫唱婦隨),세부적인 내용이 없는 원론수준의 답변이었다. 『앞으로 정부는 관계기관과 협의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陳稔노동부장관) 『위원님들의 지적을 독려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다.』(崔鍾泳법원행정처장) 입법부로부터의 자극이 없으니 행정부도 나태해지는 것이다.
지난해 나라정책연구회가 발간한 국회 예결위활동에 대한 보고서. 『국회에서의 결산심의가 소홀해지다 보니 행정부의 예산집행도다소 무책임해지고 위법.부당한 행위가 관례가 되고 있다.국회의결산심의가 말의 성찬이 아니라 행정부에 구속력을 갖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회의 결산심사가 이토록 부실한데는 이유가 있다.의원들은 주어진 짧은 기간에 막대한 분량의 정부 결산보고서를 검토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토로한다.
***보고서 검토할 시간 부족 김원길(金元吉.국민회의)의원은『국회에 회계감사기능이 없는 상태에서 의원 개인이 현장확인등 정부결산을 취급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했다.『기껏해야 특정항목에 대해,제보에 의존하는 국정감사 수준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 실제로 예산회계법에 따라 정부결산서는 새해예산안과 함께 회계연도 개시 90일전인 9월말까지 제출하도록 돼 있다.무려 1만쪽에 이르는 결산서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예산안과 함께 심사하는데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이협(李協.국민회의)의원은 『예산안과 함께 다뤄지다 보니 결산보다는 삭감이나 증액이 가능한 예산쪽으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없다』고 했다.
물론 의원들의 의도적인 무관심이나 능력부족도 뒤따른다.
복잡한 회계부문을 다루는 작업에 의원들은 대부분 까막눈이나 다름없어 지레 포기하는 경우도 다반사다.유인학(柳寅鶴)전의원은『상임위는 물론 예결위에서 결산을 따지면 여당의원들이 「이미 다 써 버린 것을 따지면 무엇하느냐」며 무안을 주곤 한다』고 말했다. 부실한 결산은 역대 국회의 통계로도 증명된다.
80년 이후 평균 예결위 개의(開議)일수 15.5일중 결산심사는 3.7일에 그친다.한해 나라살림이 1백조원을 돌파하는 시대에 이 돈을 제대로 썼는지 따져 보는 날수가 채 4일이 되지않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시화호문제도 결산심사만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지금처럼 심각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00兆심의 나흘도 안돼 안기부예산에 대한 논란도 이런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안기부는 현정부 출범 이후 비공개로나마 상당량의 예산을 정보위심의에 부쳐 예산의 투명성이라는 면에서 진일보한 자세로 평가되고 있다.
만일 정보위원들이 결산장(場)을 이용해 비공개로라도 안기부예산이 타부처에 분산돼 있지 않은 점등을 확인,우회적으로 소개한다면 투명성을 더욱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의혹을 씻을 수 있는 기회공간을 귀찮다고 방기하고 있는 셈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은 결산위원회가 없는 대신 의회내 직속기관인 회계검정원(GAO)이 결산기능을 수행한다.이곳에는 회계전문가가 무려 5천여명이나 소속돼 있다.
의회내에 전문결산기관을 두는 게 미국식이다.원장의 임기는 15년. 72년 대통령재선위원회에 비밀자금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공표함으로써 닉슨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데 단서를 제공한 것도 GAO의 작품이었다.
영국은 하원 세출위원회(PAC)가 별도로 있어 결산심의를 담당한다.특기할 만한 것은 위원회활동이 매년 12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의 하원 개회기간중 1주일에 이틀씩 상설화돼 있다는 점이다.결산위원회는 각 부처의 회계관을 심문하고 재 무부는 그 결과를 행정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제도.의식 모두 바뀌어야 이 제도는 영국의 재무행정제도를 세계에서 가장 정직하고 부패할 수 없게 만든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도 깊이있는 결산을 위해 제도와 의식 모두에 대책을 마련할 때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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