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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치아 공’을 만드는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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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궁·태권도는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의 메달밭이다. 장애인 올림픽에도 ‘효자 종목’이 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실력을 겨루는 보치아(Boccia)다.

1988년 서울 장애인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뒤 한국은 역대 올림픽 보치아 종목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장애인 올림픽에서도 박건우 선수가 금메달을 한국 선수단에 안겨줬다.

보치아 경기 방식은 동계 종목의 컬링과 비슷하다. 표적인 흰 공을 향해 두 팀이 각각 빨강 공과 파랑 공을 굴려 흰 공에 많이 붙인 쪽이 이긴다. 흰 공에 붙어 있는 상대편 공을 쳐낼 수도 있다. 감각과 집중력을 요하는 경기다.

유럽에서 성행하는 보치아에서 한국이 뛰어난 성적을 내는 비결 중 하나는 ‘공’이다. 가죽에 플라스틱 알갱이를 넣어 만드는 보치아 공은 대량 생산하지 않아 사람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다.

국내에서는 ‘리 스포츠’ 대표 이덕수(47)씨만이 생산하고, 해외에서도 만드는 곳이 몇 군데 없다. 이씨의 공은 구형(球形)에 가장 가깝고 실밥의 크기와 배열이 일정해 선수가 의도한 대로 굴러간다.

2001년에는 국제보치아위원회(IBC)가 이씨의 볼에 ‘국제 공인’ 마크를 찍어줬다. 해외에서 구입 요청이 쇄도하지만 이씨는 “베이징 올림픽 끝날 때까지는 팔지 않겠다”고 했다.

이씨는 원래 수제 축구공 제작자였다. 경남 진주에서 세 살 때 서울에 올라온 이씨는 생계를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축구공 꿰매는 일을 시작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는 세계에서 가장 큰 지름 4.5m짜리 축구공을 만들어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파키스탄 등지에서 기계 작업으로 대량 생산된 축구공이 들어오면서 이씨는 더 이상 축구공을 만들지 않는다. 도저히 채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씨는 보치아 공 생산에 매달렸다. 87년 보치아가 국내에 보급될 당시 수입품은 한 세트(13개)에 무려 80만원이었다. 이씨가 생산을 시작하면서 가격을 4분의 1로 낮췄다. 지금 수입품은 한 세트에 100만원이 넘지만 이씨는 35만원에 보급하고 있다.

이씨는 요즘도 하루 10시간 이상 보치아 공을 만들어낸다. 명색이 사장이지, 15가지 공정을 혼자 다 해낸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가죽 공을 꿰매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손등도 시큰시큰해 늘 파스를 붙이고 산다. 몇 차례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써봤는데 작업 시작 30분도 안 돼 "전화 받으러 간다”며 줄행랑치더란다.

이씨도 일이 너무 힘들어 그만둘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보치아 대회에 갔는데 사회자가 “이분이 보치아 공을 싸게 만들어 주시는 이덕수 사장님”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참가자들이 모두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서 일으켜 기립박수를 쳐 주었다. 이씨는 ‘이게 내 천직’이라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이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세상은 너무나 조용하다.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는 순간 캐스터가 “울어도 좋습니다”라고 울부짖던 방송사는 장애인 올림픽을 보면서 울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국민의 방송’이라는 곳은 생중계는커녕 녹화 중계에도 인색하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아침부터 장애인 사진이 나오면 지면이 칙칙해진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예비 장애인’이란 표현은 하도 들어서 진부해졌지만 진실이다. 그러므로 ‘예비 장애인’은 ‘현재 장애인’과 소통하고 마음을 나눠야 한다. 보치아는 장애인과 예비 장애인이 함께하고, 노인과 아이가 한편이 돼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보치아가 널리 보급돼 이덕수 사장 살림이 좀 펴고, 늦장가를 가서 가업을 이을 2세를 봤으면 좋겠다.

정영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