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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사태와 입자가속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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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태국에 프렘이라는 노병이 있다. 육군 대장 출신으로 1980년대 총리를 지냈고, 지금은 왕실 추밀원 원장이다. 국가 최고 원로인 그의 취미는 작곡. 그가 며칠 전 음반 하나를 냈다. 노래 제목은 ‘캄손 쿵 포르(아버지의 충고)’. 평소 국왕의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음악에 담았는데 국민의 화합과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반정부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점거한 지난달 26일은 그의 88세 생일이었다. 나라 걱정에, 조촐하게 계획됐던 미수연(米壽宴)은 취소됐다. 며칠 동안 시름에 잠긴 그는 국왕의 뜻을 음악으로 국민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왕의 말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면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게 그의 믿음이자 철학이다. ‘아버지의 충고’는 곧 국가 안녕을 바라는 왕의 충고를 의미했다.

방콕에 대한 비상사태 선포 이면에는 네윈이라는 인물이 있다. 여당 당원인 그는 이번 사태에 대처하는 전략을 짜는 정부의 핵심 책사다. 지략이 풍부해 태국판 제갈량으로 통한다. 사태 해결을 위한 국민투표 방안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에겐 신념이 있다. 정치인은 조국을 위해,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옳다고 판단하면 이미지보다는 이념이나 철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들어선 정부를 물러나라고 하는 반정부 시위대를 독재세력으로 규정하고 비상사태 선포라는 강공책을 택했다. 그는 강조한다. 총리가 물러나는 순간 태국의 민주주의는 죽고 미래가 없다고.

손티는 반정부 시위대의 사령관 격이다. 미디어 재벌이고 미국에서 공부했고 태국에서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한 지식인이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그가 거리로 나선 것은 부패에 대한 알레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시위대를 향해 소리친다. 2년 전 쿠데타로 물러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였던 자신이 그와 결별한 것은 부패 때문이었다고. 그리고 그 부패의 후계자인 현 정권을 그대로 두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그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며칠 전에는 조국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승려가 되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부패가 없고 투명하며,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그가 말하는 평화의 본질이다. 그는 정부와의 타협을 자신의 목숨과의 타협으로 여긴다.

생각이 다를 뿐 모두가 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지사들이다. 선진 민주주의에 대한 태국인들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이해도 할 만하다. 한데 방콕의 평범한 시민인 비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며칠 전 태국의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모두가 바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사태 해결 방안을 스위스 제네바 인근 프랑스 접경지역에 설치된 ‘거대 강(强)입자 가속기’에서 찾자고 제안했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비나의 첫마디는 부탁이다. 지금 당장 총리도 잊고 반정부 시위도 잊어라. 그리고 이 가속기가 자칫 지구를 집어삼킬 블랙홀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 가능성이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블랙홀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면 지구는 곧 종말을 맞겠지. 그리고 그는 꾸짖는다. 바보들아, 꼭 블랙홀이 아니더라도 우린 언젠간 다 죽어. 이것이 자연이 인류에게 말하고 있는 평등의 의미야. 인류의 가장 진실된, 그리고 궁극적 민주주의 모습이 바로 죽음이란 말이야. 우린 지금 너무나 단순한 이 진리를 잊고 있어. 반목과 폭력은 내가 남보다 옳고 월등하다는 교만에서 기생하는 암 같은 존재지. 비나는 제안했다. 우리 모두 분노와 편견, 그리고 교만을 내려놓고 상대가 나처럼 조국을 사랑하고 민주를 원하며 평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봐. 그리고 서로 마주 앉아 보자. 글 막바지 그의 호소는 절규에 가깝다. “바보들아, 사태 해결 방안은 남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단 말이야.”

최형규 홍콩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