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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수 시시각각

위기설 이후에 남겨진 위기의 불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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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위기설(說)엔 역시 위기가 없었다. 요란했던 ‘9월 위기설’은 그 허망한 실체를 드러내면서 사그라들었다. 미국 정부가 빈사 상태인 주택담보대출 보증회사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무려 2000억 달러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퍼부어 살려내기로 했다는 소식이 결정적이었다. 국제 금융불안의 진원지이자 이번 위기설의 ‘배후’였던 두 회사의 부실에 원인처방이 내려졌으니 금융시장에선 앓던 이가 확 빠진 기분이었을 게다. 덕분에 근거없는 위기설에 시달리던 국내 금융시장도 단박에 패닉(공황심리)에서 벗어났다. 울며 겨자 먹기로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한 미국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우리는 추석을 앞두고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미국 금융회사의 환부에 다량의 항생제가 투여됐다 해서 문제가 다 풀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위기설을 떠받치던 불안 요인의 하나가 제거됐을 뿐 잠재적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바로 국내 외환시장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의 오름세가 한 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언제 급등세가 재연될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사실 9월 위기설이 증폭된 단초의 하나는 외국인이 국내 채권을 대거 팔고 나가면 원화 가치가 폭락해 외환위기가 올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물론 이 가정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외환시장이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났다. 적은 양의 외화만 빠져나가도 환율이 폭등하다 보니 이제는 뜬소문만으로도 환율이 들썩일 정도가 됐다. 환율이 오를 것이란 소문이 환율 상승에 대한 기대감을 낳고, 그것이 달러 수요의 증가로 현실화되면서 실제로 환율을 끌어올린다. 외환 당국이 외환보유액을 동원해 개입해 봤지만 이젠 그마저 약발이 다했다. 환율을 끌어내리지도 못한 채 애꿎게 알토란 같은 외환보유액만 축냈다. 이런 식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다간 고환율로 재미보는 환투기 세력에 뒷돈만 대주는 꼴이 되고 만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다.

외환시장이 이 지경이 된 데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시장 규모가 너무 작다. 조금만 수급이 변해도 환율이 널뛸 수밖에 없다. 여기다 외환관리 능력에 걸맞지 않게 환율을 완전히 시장에 맡기는 자유변동환율제를 택하다 보니 외환 당국이 간여할 여지가 거의 없다. 원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마당에 좁은 국내시장에서 달러만 바라보고 결정되는 환율은 국제시장에서 달러값이 움직일 때마다 요동치게 돼 있다. 우리처럼 소규모 개방경제가 짊어진 숙명이다. 자유롭게 드나드는 자본거래가 압도적으로 환율을 좌우하게 된 것도 불안정성을 키웠다. 실물경제와 무관하게 환율이 결정되다 보니 경상수지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환율이 오르내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환율이 올라야 할 때 내리고, 내려야 마땅할 때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수출입을 하는 기업은 환율 예측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환율 변동의 위험을 피한다고 어설픈 헤지 상품에 가입했지만 오히려 손실만 키웠다.

이런 상태를 계속 방치하다간 진짜 위기가 와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일단 투기판이 벌어지고 나면 세계 6위의 외환보유액도 무력해진다. 9월 위기를 넘겼다고 안심할 일이 아닌 것이다. 밖의 불안 요인을 덜었으니 이제는 내부의 불안 요소를 걷어낼 때다. 외환시장에서 환율이 무차별적으로 널뛰는 것을 막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얘기다. 자본자유화를 일거에 되돌릴 수 없다면 환율 결정 방식을 바꾸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우선 자유변동환율제가 최선의 환율 결정 방식이라는 고정관념부터 버릴 필요가 있다. 세계 각국은 각자의 사정과 능력에 따라 자유변동환율제에서 고정환율제까지 다양한 환율 결정 방식을 택한다. 어느 나라에나 모두 들어맞는 정답은 없다. 이참에 정부와 학계가 나서서 비용이 적게 들면서 환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복수통화변동환율제(바스켓 방식)를 진지하게 검토해보는 것은 어떨까.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