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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IReport] 고등교육 받은 인재가 21세기 일등국가 밑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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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최종현 회장의 친구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미 시카고대 교수.

  “고 최종현 SK 회장은 진작부터 외환위기를 예견했다. 1997년 봄께 최 전 회장은 ‘정부는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고 있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분명히 경제위기를 맞고 30대 그룹의 절반은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는 4일 이 같은 비화를 털어놓았다.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고 최종현 회장 10주기 기념 경제학술 세미나’에서 ‘최종현의 경제관과 경제학의 한국화’ 주제로 발표하면서다. 이에 앞서 송호근 서울대 교수도 “최 회장은 97년 11월 초 당시 (김영삼)대통령에게 외환과 환율, 금리 비상조치를 취해달라며 그러지 않으면 큰일 나고, 한 달 후에는 더욱 사태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건의했다”며 “최 회장은 옳았다. 한 달 뒤 위기에 빠졌으니 말이다”라고 술회했다.

최 전 회장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SK경영경제연구소(소장 박우규)는 이날 ‘21세기 일등 국가가 되는 길’ 세미나를 열었다. 최 회장의 막역한 친구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미 시카고대 교수가 특별강연을 했다. 또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과 박세일·이지순 교수(이상 서울대), 한국경제연구원 김종석 원장, 한국개발연구원 설광언 부원장, 이원덕 전 노동연구원장 등이 발표에 나섰다.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장과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추모사를 했다. 이 부위원장은 최 전 회장이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장학생 출신으로 현재까지 모두 2600여 명이 학비 전액 지원을 받아 유학했거나 유학 중이다. 이승윤 전 경제부총리와 손병두 서강대 총장, 채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기성 노동연구원, 함상문 KDI 국제정책대학원 원장, 지동현 국민은행 경제연구소장, 최광 외국어대·최정표 건국대·박원암 홍익대·이인실 서강대·유장희 이화여대 교수 등도 참석했다. 고 최 회장의 아들인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손길승 전 SK 회장, 박영호 SK(주)·김신배 SK텔레콤·이정화 SK해운·윤석경 SK C&C 사장도 자리를 지켰다.

◆일등 국가가 되려면=베커 교수는 고등교육의 확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숙련된 기술자가 더욱 필요한데 이는 고등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 임금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며 “한국은 최근 30여 년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비중이 급속히 늘어났기 때문에 경제가 고속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등교육은 일등 국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경쟁적인 시장, 기업하기 좋은 환경, 노동과 상품 시장의 유연성 등이 결부돼야만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며 “그런데 한국은 창업 용이성이 세계 110위, 경영 수월성 30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4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고 최종현 회장 10주기 기념 경제학술 세미나’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미 시카고대 교수가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박세일 교수는 국가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올바른 국가전략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는 능력이 있어야 일등 국가가 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대통령실이나 총리실 직속으로 국가전략기획기구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또 “중국과 러시아 등이 동북아의 패권 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막고, 김정일 이후 북한에 친한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설광언 한국개발연구원 부원장은 “최 전 회장은 최고급 두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서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은 노동력을 늘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말 우수한 인재를 키워냈는지에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교육기관 간 경쟁 촉진과 해외 고급두뇌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의 외국인 투자 유치 잠재력은 세계 17위지만 실제 투자 유치 실적은 115위에 그친다”면서 “시장개방과 법규의 정비, 규제 완화 등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적 모델을 만들자=송호근 교수는 산업화 세대의 업적과 위상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금까지 후속 세대들은 산업화 세대가 뿌린 경제성장의 씨앗과 기틀을 평가하는 데 지극히 인색했으며 부정 일변도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외환위기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최 회장은 1인당 국민소득 6만 달러의 일등 국가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평가했다. 송 교수는 이어 “최 회장이 주창한 뉴내셔널리즘은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공존할 수 있는 개방적 내셔널리즘”이라면서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경쟁 국가를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자”고 지적했다. 송병락 교수는 한국적 경제학 모델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최 회장은 경제학의 한국화, 한국적 경제학을 강조했다”면서 “이를 위해 서울경제학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교수는 “선진국에는 독창적 경제모델을 가진 독창적 경제학파가 있다”며 “한국이 일등 국가가 되려면 한국만의 경제모델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원덕 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은 일등 국가의 노사관계 모델로 ‘더 좋은 일, 더 좋은 보상(Better work, Better Pay)’을 제안했다. 그는 “대립적 노사관계에서는 노동자는 일을 덜하고 임금은 많이 받기를(Less Work, More Pay) 원하고, 사용자는 일은 더하고 임금은 적게 줬으면(More Work, Less Pay)한다”며 “그러나 최 전 회장은 노사 상생을 위해서는 일도 많이 하고 보상도 많은(More Work, More Pay) 모델을 제시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어령 고문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계층 분류를 이제는 종식해야 한다”며 “창조적 계층을 토대로 한국의 신기업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영욱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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