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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외환위기의 진원지’ 태국은 어디로?정국 혼란 장기화 우려…증시 외국인 이탈 가속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태국 방콕의 정부 청사가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지 6일로 12일째다. 방콕의 정국 추이에 국제 금융가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97년 태국 방콕이 아시아 금융위기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9월 경제 위기설'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중앙 선데이가 태국 현지의 정정을 살펴보고,사틱 국가투자청장도 만났다.다음은 중앙선데이 기사전문.


1997년 7월 태국 방콕은 아시아 금융위기의 촉발지였다. 바트화 폭락으로 시작된 위기의 태풍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를 거쳐 한국까지 북상했다. 방콕은 요즘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다. 탁신 전 총리 부부의 해외 도피로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12일째 계속되면서 정부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태국의 정치위기가 경제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는가. 한국 경제가 ‘9월 위기설’로 홍역을 앓는 가운데 국제금융가 일각에선 태국의 정정(政情)을 주시하고 있다.

태국의 정국 혼란을 해결할 방법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사막 순다라웻 총리가 사태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길이다. 이는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농성 중인 시민민주주의연대(PAD)가 요구하는 것이고 절반 이상의 여론도 지지한다. 둘째, PAD가 농성을 풀고 정부가 4일 발표한 국민투표를 통해 총리 진퇴를 결정하는 방안이다. 마지막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푸미폰 야둔야뎃(80) 국왕이 중재자로 나서 원만한 수습방안을 찾는 길이다. 하지만 태국의 정치위기는 불신과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후원을 받는 사막 총리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국정 리더십을 사실상 상실했다. 2일 비상사태 선포 직후 총리가 요구한 시위대 강제진압을 군은 거부했고 경제계와 학계도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대학생들이 총리 사퇴 시위에 동참하고 외무장관도 자진 사퇴 방식으로 항명했다. 이 와중에 사막 총리는 5일 오후 “수일 내에 방콕에 선포된 비상사태를 해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외국투자자 이탈, 외국인 관광객 급감, 여론 악화에 대한 일종의 굴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5일 “총리직 사퇴는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것도 사퇴 불가 의지를 담은 말이다.

그가 사퇴를 거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그의 사퇴는 현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정부 자체가 부패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PAD는 사막 정권이 부패한 탁신 전 총리의 꼭두각시 정권이라며 5월부터 반정부 시위를 벌여 왔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PAD는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사막 총리가 이끄는 국민의 힘(PPP)당이 수십 건의 부정선거를 통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일에는 태국 선거관리위원회가 PPP의 총선 부정 혐의를 인정해 헌법재판소에 당 해체를 요청하기로 결정한 상황이다. PPP는 탁신 전 총리의 정당이었던 타이락타이(TRT)당이 선거부정으로 해체된 후 다시 만들어진 당이다. 사막 총리가 총재를 겸하고 있다. 사법당국은 현재 탁신 전 총리의 재임 기간 중 부패 사건에 대해 수사를 하고 있다. PPP와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5개 정당도 총리 사퇴 시 부패 정당과 연합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때문에 연정 파트너는 헌법재판소가 PPP의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해체를 결정할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시위를 주도하는 시민단체 PAD는 이미 정국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지도부는 사막 총리가 퇴진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정당을 결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믿는 이는 거의 없다. 2005년 결성된 이 단체는 탁신 전 총리의 정치적 동지였던 손티 림통쿨과 방콕 시장을 지낸 잠롱 스리무앙 등 5명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모두 정치경력이 있고 사회적 영향력도 대단한 인물들이다. 특히 손티 대표는 2006년 무혈쿠데타로 실각한 탁신 전 총리 시절 정국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탁신의 부패를 보고 그와 결별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탁신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데 대한 반발로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그는 현재 ASTV 등 10여 개 언론매체까지 갖고 있어 사회적 영향력도 엄청나다.

정부 청사에서 농성 중인 한 남성이 6일 망원경으로 바깥 동향을 살피고 있다. 방콕 AP= 연합뉴스

그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당을 만들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국민이 원하는 등 급격한 상황변화가 올 경우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며 여운을 남겼다. 그가 4일 정부가 내놓은 국민투표에 반대한 것도 수개월이 걸리는 투표 준비 과정에서 정국 주도권을 놓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더구나 PAD는 태국 사회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푸미폰 국왕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다. 시위대가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도 왕정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정치평론가인 탄농 칸통은 “PAD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국민투표는 어려울 것이고 사막 총리가 사퇴한다 해도 향후 정부 구성 등 정국 주도권은 PAD의 입장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군부 쿠데타나 정국 위기 때마다 혼란을 수습했던 푸미폰 국왕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뭘까. 태국에서 ‘살아있는 부처’로 존경받는 국왕은 1970년대 이후 발생한 10여 차례의 쿠데타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밝혀 정국을 안정시켰을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런 국왕이 지난달 말 사막 총리를 잠깐 면담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방콕포스트는 사막 총리가 국왕으로부터 정국 주도권에 대한 묵인을 얻지 못했다고 관측했다. 이와 관련, PAD 손티 대표는 “여론이 총리 사퇴로 기울었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슈랸드 베자지바(정치평론가)는 “국왕이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총리에 대해 사퇴를 권고하면 스스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고, 시위대 입장을 지지하면은 자신의 세력을 옹호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런 가운데 태국 경제는 잠재적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정정 불안은 주식시장을 강타했다. 지난달 26일 시위대의 정부청사 점거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은 하루 평균 30억 바트(약 975억원)어치의 주식을 팔았다. 증시 애널리스트들은 400억 바트(1조3000억원)어치를 추가 매각할 것으로 예상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지난 9개월간 1070억 바트(약 31억 달러)어치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SET 주가지수는 올해 초와 대비해 21%가량 빠졌다. 주가는 정치적 악재가 나올 때마다 2% 안팎의 급락세를 보여 왔다. 그 바람에 지난해 말 6조6000억 바트였던 시가총액은 현재 5조2000억 바트로 감소했다. 태국 경제의 젖줄인 관광업계는 올해 관광수입을 당초 목표치(205억 달러)의 8~9% 수준에 불과한 14억7000만~17억6000만 달러로 예상했다. 시티코프 증권의 애널리스트인 통몽쿳 통야이는 태국 관영 TNA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 혼란이 장기화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 의욕이 위축되고 있는데 이는 태국 경제의 잠재적 위기를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바트화는 아직 안정세를 지키고 있다. 5일 바트화 환율은 미 달러당 34.5로 전달(34.65)보다 다소 내렸다. 태국 중앙은행은 5일 수출경쟁력을 위해 환율이 더 올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외국인 투자도 유보상태에 불과해 바트화 폭락사태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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