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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9부 능선에 가까이 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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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28면

공포구간 진입
‘코스피 장중 1400 붕괴(9월 2일)’→“이젠 신뢰가 무너졌다. 투자심리를 되살릴 해법이 급하다(9월 3일, 증권·자산운용사 사장단)”→“루머에 휘둘리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자. 한국경제를 신뢰해야 한다(9월 4일, 증권사 리서치센터장 긴급 기자간담회)”

위기설 휩싸인 증시, 탈출구는

불과 한 주 새에 시장의 장수(將帥)들이 총동원됐다. 보기 드물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고삐 풀린 환율 오름세와 9월 위기론, 중견기업 궁지설과 외국인·개인의 매도 폭탄이 뒤엉켰다. 결국 주가는 지난해 3월 초 수준까지 꼬리를 내렸다. 1년 반 전 1400 이후 나타난 불꽃 장세로 챙긴 몫을 몽땅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셈이다.

투자자들은 겁이 덜컥 날 만하다. 주가가 한창 타올랐던 지난해 여름 이후에 발을 담갔다면 더욱 그렇다. 활황장의 상징이던 미래에셋증권 주가는 지난해 11월 초 20만원 대에서 8만원대로 추락했다. 펀드 수익률도 마찬가지다. 펀드평가사 제로인이 조사했더니 미래에셋 디스커버리, 한국운용 삼성그룹주, KTB운용 마켓스타 같은 간판급 펀드들은 1년 수익률이 ‘-20%’ 안팎으로 처졌다. 특히 최근 한 달 만 보면 하락률이 10%가량에 이르면서 투자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다.

증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을 비롯해 투심을 달래는 어떤 수사(修辭)도 잘 통하지 않는다. 심리가 시장을 좌우하는 형국이다. 중앙SUNDAY는 지난해 미국 경제학자인 하이먼 민스키의 ‘거품의 8단계 징후’ 모델을 빌려 여러 번 과열 장세에 경고 사이렌을 보낸 바 있다. 이번에도 이 모델에 현 시장상황을 적용해 보니 대략 7~8단계로 나타났다. 주요 은행·기업의 파산(미국), 주가 하락세 지속과 현금화, 낙관에 취했던 대중의 비관론 러시 등 지금이 딱 그 꼴이다. 지금이 거품의 마지막 국면으로 좀 더 참으면 최악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것이란 얘기가 된다.

이윤학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

투자의 세계에선 ‘극단적 비관’이 절망은 아니다. 역으로 희망의 출발점이 됐다는 교훈을 100년 투자사(史)는 생생히 전해 준다. 서울 여의도 우리투자증권 빌딩에서 만난 이윤학(경영학 박사) 투자정보팀연구위원은 “시장의 추세가 바뀔 땐 언제나 탐욕 또는 공포가 시장을 지배했다”고 말했다. 그는 2년 전 국내 최초로 ‘탐욕과 공포 지수(Greed & Fear Index)’를 개발해 시장을 짚고 있다.<그래픽 참조> 세계 최초라는 이 지수는 개발하는 데만 6개월 걸렸는데, 경기·기업이익·자금흐름·시장의 4개 부문에서 11개 지표를 섞어 투심(投心) 좌표를 잰다. 심리를 본다고 뜬구름 잡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실제로 이 지수는 2006년 봄의 하락세, 2007년 여름의 용광로 장세 같은 중요 변곡점을 앞서서 예고하는 실력을 발휘했다.

“주가 출렁임은 펀더멘털로 풀지 못할 때가 많다. 아무리 찾아봐도 급등락 이유가 없는데 주가는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이럴 땐 주식이나 펀드를 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쏠림 대열’에 휩쓸린다. 패닉의 시작이다.” 이 박사는 “공포구간의 전 단계로 투자자들이 파랗게 얼어붙는 청색구간에 돌입한 게 1주일 전이다. 지금은 아마 공포구간에 들어섰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4년 만에 가장 나쁜 상황이다. 자금시장, 기업 실적 추정치 변화, 소비자 경기전망 등이 가파르게 떨어졌다. 지수의 수치를 구하는 데 이틀이 걸리는데, 이번 주쯤 다시 계산해 공포구간에 진입했는지 확인할 참이다.
 
얼키설키 꼬인 지뢰밭
이 박사는 “여러 악재가 켜켜이 쌓였는데 지수에서 유독 한 가지만은 좋다”고 했다. 바로 자금흐름이었다. 공포감 속에서도 아직 ‘펀드 런(펀드 환매사태)’은 없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제로인에 따르면 코스피 낙폭이 커진 6월 이후에도 주식형펀드로 들어온 돈은 달마다 1조~2조원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박사는 낙관은 금물이라고 했다. 앞으로 힘든 상황이 더 이어지면 펀드환
매에 나서는 투자자들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주가가 오를 때 없앴던 ‘로스 컷(손절매)’ 규정을 최근 다시 살린 기관이 많다”고 전했다. 그는 여러 악재가 칡뿌리처럼 얽혀 있는 만큼 공포구간을 벗어나도 회복 탄력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장담하긴 어렵다고 했다. 당장 외국인 매도 공세만 해도 그렇다. 이 박사는 “한국 시장이 최근 다른 증시보다 상대적으로 저조한 이유는 우리만의 리스크가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위기 뼈대는 환율과 신용위험 확대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점차 총체적인 ‘시스템 리스크’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컨대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도 외국인 매도를 가속화한 원인 중 하나라고 봤다. 세계 경제를 뒤흔든 미국의 ‘신용위기 본토(本土) 바이러스’를 한국 땅에 옮겨 놓는다는 우려다.

중소기업들이 환헤지를 위해 가입한 ‘키코(KIKO)’ 상품도 문제다. 이 박사는 “지난해 기업들도 주식형 펀드에 많이 들어갔다. 그런데 수출도 잘 안 되고, 키코에 들었다가 환율 상승으로 막대한 환차손마저 입으니 현금이 급해졌다. 당연히 펀드 환매 유혹을 느끼기 쉽다”고 했다.

공포 탈출법

그럼에도 그는 ‘공포의 9부 능선’에 도달했다고 강조했다. 기회를 엿봐야 하는 타이밍이란 얘기다. “지인들에게 ‘투자하라’고 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받는다. 아무도 안 믿는다. 공포와 불신이 극에 이르렀다는 소리다. 공은 바닥에 닿으면 되튄다.”

이 박사에게 “반등한다는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탐욕과 공포 지수로 전망까지 하기는 어렵다. 다만 현주소를 좀 더 냉정하게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아무튼 ‘시장의 주기’로 미뤄볼 때 바닥일 가능성은 한층 커졌다는 뜻이다. 그는 “요즘 부자들을 만나면 묘한 스릴을 느낀다는 이들이 많다. 떨어진 낟알을 잘 거둬 큰 이문을 볼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농부 투자론’으로 남다른 수익률을 올린 하버드대 출신의 로널드 뮬렌캠프 펀드매니저는 “6개월~3년까지 단기적으로 주가는 인간 심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보면 탐욕과 공포로 생긴 변동성은 씻은 듯 사라지고, 주가는 ‘경제 기상도’의 영향권 아래 다시 놓인다”는 지론을 편다. 공포의 노예가 되기보단 반전의 묘수를 찾는 투자자에게 기회가 열린다는 얘기다. 2차대전의 공포 앞에서 군수 수요를 읽고 저가주를 매집해 투자 발판을 마련한 고(故) 존 템플턴 경은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안아 20세기 최고의 투자자란 명예를 얻었다. “강세장은 비관론에서 싹트고, 회의를 먹고 자라며, 낙관론을 업고 성장하다, 열광에 빠져 종말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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