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23>LPGA 영어 의무화 철회  역시 실력이 먼저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8호 24면

필자가 수학하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골프스쿨(PGCC)은 ‘작은 지구촌’이었다. 미국과 아시아·유럽·중남미·아프리카 등에서 온 학생들이 한데 모여 4학기 동안 골프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보통 한 클래스의 정원은 40명 내외. 국적도 각양각색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학생들의 국적 분포가 PGA나 LPGA투어의 세력 판도와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미국 학생 20여 명에 한국과 스웨덴 학생이 서너 명씩 됐다. 스페인·스위스 등 유럽 학생에 중국·대만·일본·싱가포르·필리핀 출신 학생도 한데 어울렸다. 이뿐인가. 멕시코 출신 청년 안토니오는 여학생들에게 인기였다. 쿠바에서 온 여학생 아냐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남학생도 빼놓을 수 없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학생들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두 가지, ‘골프’와 ‘영어’였다. 골프 실력이 뛰어난 학생이 입학하면 학교 전체에 금방 소문이 퍼졌다. 더구나 학기 내내 계속되는 교내 골프대회 성적은 늘 화제였다. 게시판에 붙은 리더보드를 확인하며 이런 대화가 오갔다.

“어제 킴(Kim)이 69타를 쳤대.”
“킴? 아, 그 체격 좋은 친구 말이지.”
국적과 인종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설사 영어가 좀 서툴더라도 골프 실력이 뛰어나면 ‘짱’으로 인정해 주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 다음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영어’였다. 수업 시간마다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고, 답안을 써내야 했다. 아시아권이나 중남미 출신 학생들은 영어가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커뮤니케이션에는 문제가 없었다. 스패니시를 사용하는 쿠바 출신의 아냐는 영어 발음이 무척 어눌했지만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 ‘토너먼트’를 ‘또나멘또’로, ‘컨트리’를 ‘꼰뚜리’라고 발음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LPGA투어가 내년부터 선수들을 상대로 의무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라고 통보했다가 2주일 만에 방침을 철회했다.

여론의 역풍을 맞은데다 후원사들까지 대회를 보이콧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한국의 여자골퍼들, 앞으로도 ‘잉글리시’ 때문에 스트레스 좀 받게 생겼다. LPGA가 이 조치를 철회한다고는 했지만 영어 문제는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수 있는 휴화산이다.

문제는 영어가 아니라 남 앞에 나서길 꺼리는 소극적인 태도다. 문화적인 차이가 결국 영어 의무화 해프닝을 불러온 것이다. 쿠바 출신 여학생 아냐처럼 발음이 좋지않더라도, 문법에 틀리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함께 어울리는 자세가 절실하다.

이 기회에 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최경주 프로가 2004년 마스터스에서 들려준 말을 전하고 싶다.

“미국 진출 초기에는 선두권에 나서기만 하면 불안해지더라고요. ‘경기가 끝나면 어떻게 (영어로) 인터뷰해야 하나’ 하는 걱정을 하다가 샷을 망치기 다반사였지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난 뒤엔 아예 마음을 고쳐 먹었어요. ‘영어보다 골프 실력이 먼저다. 성적이 좋으면 인터뷰야 대수냐’고 생각했지요.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그래도 상관없이 큰 소리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는 겁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았다. 드라이브샷이 괜찮았고, 퍼팅도 쏙쏙 들어갔다. 내일은 더 잘하겠다.’ 이렇게 인터뷰하고 나니 다들 좋아하던걸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