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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삼촌의꽃따라기] 흰 얼굴의 섬처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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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쯤 잤을까? 밤새 달려 새벽녘 항구에 도착해 잠시 눈을 붙인 게 그렇다. 첫 배를 타야 좀 더 여유롭게 탐사할 수 있기에 까짓 수면부족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한다. 정확히 오전 7시30분. 파장금호는 육지를 밀어내며 천천히 바다로 나아간다. 고슴도치 같다 하여 고슴도치 위(蝟)자를 쓴다는 위도는 생각보다 가깝게 보인다.

섬으로 가는 페리에는 슬픈 역사가 있다. 1993년 무리한 운항으로 292명의 사망자를 낸 서해훼리호 침몰이 그것. 몇 해 전에는 방폐장 건립을 반대하는 검붉은 현수막이 격포항을 뒤덮기도 했다. 내게는 젊은 시절 아버지와 낚시를 하러 간 추억의 공간이다. 그런 위도가 식물에 미친 지금의 나를 이렇게 불러들인다. 배 안은 컵라면을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켜는 낚시꾼들로 시끌시끌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짧은 옷차림 여행객들의 수다도 끊이지 않는다. 컵라면을 시켜놓았는데 배는 벌써 파장금항의 품에 안기려 한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라면을 후후 불어 먹고는 애마의 네 바퀴를 섬에다 올려놓는다.

이 섬에 위도라는 지명이 이름에 들어간 한국 특산식물이 자생한다. 위도상사화다. 다른 데서도 간혹 발견된다지만 어디까지나 오리지널은 위도 것이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 “혹시 상사화 많이 피는 데 아세요?” 관상용 상사화와는 다르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상사화로 통할 것 같아 물으니 대번에 알아듣는다. 상사화처럼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필 때는 꽃이 없지만 위도상사화는 흰색에 가까운 상아빛(담황백색) 꽃이 피는 점이 다르다.

알려준 곳으로 가다가 밭둑에 핀 위도상사화 군락을 만났다. 이거 너무 싱겁지 않은가? 파란 잉크 물 가득 받쳐든 위도상사화에 포커스를 맞춘다. 상사화의 하얀 얼굴에 총각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모기가 장난이 아니다. 차에 가서 모기퇴치제를 바르고 오느니 그 시간에 한 컷이라도 더 찍는 게 낫겠다 싶어 버티기로 한다. 혹사를 해서 오작동이 심해진 카메라는 애를 태우고, 그럴수록 모기들은 더 극성이다. 지금껏 나가본 출사 중에서 가장 많은 ‘헌혈’을 하고서야 밭에서 나온다.

섬 곳곳의 파란 풍경을 보자니 ‘What a wonderful world’가 따로 없다. 배에 올라 돌아보는 위도는 벌써 그리운 섬. 그립지 않으면 섬일 수 없으리라.

다음날, 골병 든 카메라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도 모처럼 하루 쉬기로 한다. 기념으로 경기도적십자혈액원에 들러 진짜 헌혈을 한다. 간호사의 하얀 얼굴에서 위도상사화를 본다.

글·사진 이동혁 http://blog.naver.com/freebo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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