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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여성 첩보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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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는 독일 언론사의 주일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과 독일의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 스탈린은 조르게의 정보를 바탕으로 극동의 군사 경계를 풀고 유럽 전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르게는 첩보원으로서도 뛰어났지만 주위에 늘 여성이 끊이지 않는 매력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의 공분을 사고도 남음이 있다. “정보활동은 지식이 풍부하고 머리가 좋은 남자 아니면 곤란하다. 여자는 정치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 상류 부인들과 교제했지만 그들은 남편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니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조르게의 발언과 달리 첩보전의 세계에도 여성의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정보부대의 첩보원으로 활약했던 네덜란드 여성 마타하리일 것이다. 파리에서 댄서 생활을 하던 그녀는 여러 명의 연합군 고위 장교들과 관계를 맺었다. 조르게가 그랬던 것처럼 마타하리가 빼낸 정보가 과연 값어치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정보 소스에 대한 접근만큼은 발군이었다.

동양의 마타하리라 불린 여성은 가와시마 요시코였다. 청나라 공주로 태어난 가와시마는 어릴 때 일본인에 입양돼 일본 교육을 받고 일제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 수립에 막후 활약을 했다. 남장을 하고 다녔지만 곳곳에서 염문을 뿌린 건 마타하리와 닮았다.

김수임은 한국판 마타하리라 불렸다. 영어 회화가 능숙한 인텔리였던 그녀는 미 군정 기간 중 미군 장교와 동거하면서 남로당의 공작활동을 돕는 등의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6·25 발발 직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해 훗날 북한의 초대 외상이 된 이강국은 그녀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지난주 탈북자를 가장한 간첩 혐의로 기소된 원정화는 적잖은 수의 군 장교나 정보기관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한다. 북한 보위부 소속이란 말을 듣고서도 사랑했기에 신고할 수 없었다는 장교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나마 원정화가 그리 유능한 공작원은 아닌 듯하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지금까지 수사결과를 보면 고위층에는 접근하지 못했고 북한에 넘겼다는 정보도 별게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안이 가시는 건 아니다. 만약 조르게의 수완에 마타하리의 미모까지 겸비한 여성 공작원이 내려와 우리 군을 농락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지 상상조차 두려워진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