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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간송미술관 최완수 학예실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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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유가(儒家)에서는 문(文).사(史).철(哲)에 두루 능통하며서화(書畵).풍류까지 겸비한 사람을 「통유(通儒)」라 했다.반면 특정 분야에 빠져있는 사람을 「궁유(窮儒)」라 했다.바야흐로 궁유가 행세하는 세상이다.
궁유의 시대에 통유의 길을 고집해온 인물이 최완수(崔完秀.54)간송미술관(한국민족미술연구소) 학예실장이다.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꼽히는 인물중 한 사람이다.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와 일견 고집스러움이 엿보이는 동그란 동안(童顔).5 0대중반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미술사 연구를 통해 우리 역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생을 바쳐온 그를 그가 심혈을 바쳐 준비한 「간송미술관 개관 25주년기념 진경시대전」(2일까지)이 열리고 있는 서울 성북동간송미술관 연구실에서 만났다.
『나에게 역사연구는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친뒤 서울로 올라와 경복중에 입학,고등학교 1학년때 한문반에서 백아(白牙)김창현(金彰顯.작고)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운명의 시작이랄까요.그분에게 서 한학과 보학(譜學),선비로서 지녀야 할 마음과 몸가짐을 자상하게 배우게 됐죠.대학졸업후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생활을 하다가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선생의 권유로 이곳에 와 먼지 쌓인 서가에 있던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완질을 본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어요.이 책을 본 순간 한 10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두말않고 이곳에 묻힐 생각을 굳혔고 만30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서울대 입학식날 한복을 차려입고 등교,학생과 교수들 사이에 문리대 명물이 된 崔씨(그는 요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복을 고집한다)는 곧 크게 실망하게 된다.한학과 조선문화 전반에 대해 이미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에게 대학 은 『총체적인 이해없이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논문이라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비춰졌고 논문 수준도 그에겐 『일본학자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었던 것.『여기서는내뜻을 펴지 못하겠다』는 생각에서 2학년이 된 그는 강의실 대신 동양사연구실을 찾았다.동빈(東濱)김상기(金庠基.작고)선생의아낌을 받으며 연구실 한쪽에서 불교사 공부로 대학시절을 마칠 수 있었다.
미술사학자로 반드시 갖추어야할 문화재에 대한 감식안을 전수해준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선생.
『서양식 교육이 우리 전통문화의 맥을 끊었다는 생각을 가졌으므로 처음부터 학위를 위한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어요.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국립박물관에서 연구원을 모집한다기에 응모했지요.65년4월부터 국립박물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현장경험 을 쌓기 위해 경주.부여.공주등 주요 지방박물관 근무를 자원했어요.경주에내려간뒤 새벽부터 유물을 찾아 지역 일대를 헤매며 현장조사에 몰두하다가 저를 찾아온 혜곡선생을 처음 뵙게 됐어요.』 당시 혜곡은 감은사지 해체복원공사 때문에 내려온김에 학계에서 칭찬이자자했던 사학도 崔씨의 재목을 가늠하기 위해 일부러 찾았던 것.밤새워 얘기를 나눈 혜곡은 주요 발굴현장에는 崔씨를 동행시켜현장경험을 쌓게하고 자신의 학문적 지식 을 전수해 준다.후에 혜곡이 임종을 앞두고 崔씨를 불러 평생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소장한 자료가 쌓여있는 방의 열쇠를 손에 쥐어준 것은 혜곡의 崔씨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짚어보게 하는 일화다.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의 선비로서의 자세를 일러준 백아,역사학의 방법론을 전수한 동빈,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간송 전형필로 이어지는 역대 최고의 문화재 감식안을 이은 혜곡등 3인의 의발(衣鉢)을 전 수한 최완수실장.그의 지난 30년간의 연구성과는 다방면에 걸쳐 눈부시다.
68년 간송미술관 소장 전적자료를 정리한『간송문고 한적목록』을 펴낸 이래 71년 가을부터는 『간송문화』를 창간해 정리된 자료와 연구성과를 담아내고,연구결과를 뒷받침하는 문화재들을 모아 매년 두번씩 전시회를 열어 조선시대의 찬란한 문화예술의 진수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간다라불의고(佛衣攷)」「김추사의 금석학」등 관련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연구논문을 비롯해 스스로 필생의 역작으로 생각하는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93년간)등을 펴내며 국내 학계의 미답분야를 개척했으며,송광사.운주사 대웅전의 불상 복 원작업에도 참여했다.지금 학위는 학사지만 74년 스스로 자신을 찾아와 배운 박사 내제자가 30여명에 달한다.『스승복이 많은 사람이 제자들에게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겸손해 한다.
묻혀있던 조선문화에 찬란한 빛을 주는 작업에 매달려 결혼도 잊은 그는 『미술사를 통해 조선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기반을 마련한 게 가장 큰 보람』이라면서 많은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고마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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