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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과학자.작가 망명-정갑렬 準박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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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 사회에서 중상류 생활을 했던 두 명의 고급 두뇌가 끝내사선을 무릅쓰고 한국행을 택하게 된 것은 바로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왕조 체제의 모순 때문이었다.작가 장해성씨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김정일 흉을 본 것이 탄로나 50평생 쌓아온 충성심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는가 하면,정갑렬씨의 뛰어난 과학재능도 권력을 앞세운 처가쪽의 시기와 견제에 밀려 꽃을 피울 수 없었다.
다음은 두 사람이 홍콩 당국의 조사과정에서 최근 밝힌 탈출 동기.경위를 본사가 단 독 입수해 본인의 고백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지난 51년 2월7일 일본의 오사카(大阪)다카쓰키(高槻)시 아쿠타가와(芥川)초(町)에서 태어났다.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정재선.당시 72세)가 열렬한 공산주의 신봉자여서 가족 모두가59년 북한으로 이주했다.
당시 나는 오사카 조선초급학교 3학년이었다.북한에서 평남강서군 기양중학을 거쳐 기양고등기계공고를 나왔고 과학 분야의 재능을 인정받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했다.
고교때 주조 열처리 기술자격증을 취득했으며 고체물리 전문가로서 3급 연구가(준박사)가 돼 탄탄대로를 달렸다.특히 81~86년에는 국가과학원 물리연구소 연구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북한 체제의 한계에 부닥쳐 좌절하게 됐다.북한에선 재능보다 나이에 따라 준박사.박사 칭호를 준다.또 학계 내에는시기와 질투.견제 심리로 가득차 연구자들끼리 알력이 심하다.준박사 단계를 끝내고 박사 신청을 했으나 같은 과 학자의 길을 걷는 전처(김경애) 언니의 시샘에 휘말렸다.박사 학위도 좌절되고 격렬한 부부싸움이 벌어져 85년 아내와 이혼했다.
1년간 무직으로 있다가 87~89년 평양대극장 음향기술실험실연구원을 지냈다.그 뒤부터 탈출 전까지는 조총련 2세인 김일룡이 사장으로 있는 「메아리음향사」 소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김일룡과의 사이가 나빴고 형(정정렬)과 함께 온집안의돈을 투자해 강서군에 낸 메아리음향사 분점의 영업실적이 엉망이돼 북한 체제에 큰 실망을 갖게 됐다.과학자로서 재능을 꽃피울수도 없고,그렇다고 더 이상 사업을 할 여건 도 되지 않는 게북한이었다.
결국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 발명 신기술및 신제품 전시회」에 참가했다가 귀국 도중 자유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4월 11일 단장 1명과 통역 1명,기술자 5명 등 모두7명의 북한대표단은 평양을 출발해 12일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우리는 돈을 아끼려 항공기를 안타고 기차 여행을 했기 때문에 전시회가 끝나고 5월7일 베이징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기진맥진했다.
나는 일행에게 『베이징에서 샀던 안경이 맘에 안들어 바꿔야 된다』며 숙소를 빠져나왔다.
곧바로 한국대사관을 찾았으나 일과가 끝나 문이 닫혀있었다.할수 없이 말이 통하는 일본대사관을 찾았다.이 때가 오후 11시였다.『여권을 분실해 대사관 직원과 급히 만났으면 좋겠다』고 면담을 요청했다.일본어가 유창했던 탓인지 대사관 직원은 경비원에게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도록 했다.대사관 접견실에서 면담을 하다가 『나는 사실 북조선 사람인데 스위스 제네바의 전시회에 참가했다가 귀로에 일본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찾아왔다』고 밝혔다.그러자 일본 대사관측에선 『 내일 다시 오라』며 따돌리려 했다.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며 『한국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우겼다.결국 새벽무렵 한국사람을 한명 소개받았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上海).선전(深수)등을 거쳐 15일 홍콩에 들어와 즉시 한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홍콩=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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