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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60주년] 북한에선 전국 규모 토지개혁 26일 만에 마무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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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토지개혁은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됐지만 불과 26일 만에 마무리됐다.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고 5정보 이상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토지개혁법령 1조는 “일본인 토지 소유와 조선 지주들의 토지 소유 및 소작제를 철폐하고 토지이용권은 경작하는 자에게 있다. 북조선에서의 농업제도는 지주에게 예속되지 않는 농민의 개인 소유인 농민경리에 의거한다”고 규정했다.

당시 북한에선 총농가의 4%에 해당하는 지주들이 총경지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있어 농민 대부분은 빈농이거나 소작농이었다. 토지개혁으로 46년 3월 5일 이후 정부로부터 분배받은 토지에서 나온 농산물은 자신들이 처분할 수 있게 됐다. 대신 수확량의 25%를 현물로 국가에 납부했다. 토지의 비옥도를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세금을 부과한 데 대해서는 일부 불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농민은 소작농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만족감을 표시했고 김일성 정권 수립에 지지세력으로 바뀌었다.

토지개혁 직후 북한 지역을 돌아본 미국인 여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토지 소유가 북한 농민들을 새로운 정권의 강고한 지지세력으로 만들었다”고 결론지었다.

대지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김책·안길 등 김일성 위원장의 최측근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 팀이 극비리에 추진한 것도 지주들의 반발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지주들의 일부 저항은 있었으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토지문서를 챙겨 38선을 넘어 남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해방 후 혼란 정국 속에 북한의 경제개혁 조치는 남북의 체제 분열을 예고했고, 제도적·내용적인 분단이 시작됐던 셈이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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