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차원 영상 분석 또 분석 장미란 ‘금빛 자세’ 찾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6호 24면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은 지구촌 최대의 축제다. 특히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선 연일 세계신기록이 쏟아지며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평준화되는 체격 조건과 심화되는 경쟁 속에서 스포츠 과학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이번 올림픽 무대에서 한국 선수들이 정상에 서는 데도 국민체육진흥공단 산하 체육과학연구원 연구원들의 땀이 배어 있다.

여자 역도 최중량급에서 금메달을 딴 장미란. 그에게도 큰 고비가 있었다. 2006년 말 훈련을 갑작스럽게 중단했다. “부상 위험이 크다”는 체육과학연구원 문영진 박사의 경고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근전도 분석(EMG)을 통해 장미란의 왼쪽 승모근에 걸리는 부하가 오른쪽의 무려 5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문 박사는 근력 균형을 되찾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골반과 어깨·팔꿈치·손목 등의 고통을 호소해 온 장 선수는 운동 중단 후 근력 교정 훈련에 주력했다.

문 박사는 3차원 영상분석을 통해 장미란이 역기를 들어 올릴 때 오른발이 자꾸 뒤로 빠지는 문제점도 발견했다. 지난해 여름까지 근력·자세 교정에 집중한 장미란은 같은 해 9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연패에 성공했고, 올림픽 금메달로 이어졌다.

1999년 연구원에 들어온 문 박사는 한동안 대표팀의 기록 분석 작업만 해오다 2003년부터 대표팀 지도자들과 호흡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연구원에서 실시하는 1급 경기지도자 과정에서 이형근·오승우 현 남녀 역도대표팀 감독을 지도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두 감독과 함께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분석하는 ‘실시간 영상 분석 시스템’을 개발해 선수들의 자세 교정에 적용했고, 그 결과는 두 감독의 논문으로 쓰였다.

사재혁 선수의 금메달과 윤진희 선수의 은메달도 문 박사와 두 감독의 합작품이다. 문 박사는 “새로운 기술이나 훈련법을 선수에게 적용할 때는 반드시 감독의 판단을 거쳐야 한다”며 “첨단 과학 분석기법도 선수들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감독의 감(感)과 어우러질 때만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선진국에 비해 열악한 장비·시설 속에서도 한국 스포츠 과학이 힘을 발휘하는 데에는 코치진과 연구진을 밀착시키는 전략이 주효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해도 대표팀 감독과 연구원의 사회적 지위 차이가 크다는 점 때문에 원활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1급 경기지도자 과정은 연구원과 국가대표 감독이 사제지간으로 만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연구원이 태릉선수촌과 붙어 있는 것도 상호 교류를 활성화하는 요인이다.

박태환의 수영 금메달도 노민상 감독과 연구원 송홍선 박사의 공동 지도 없이는 어려웠다. 일본에서 운동생리학을 전공한 송 박사는 젖산·스텝 테스트 자료를 토대로 노 감독과 함께 박태환의 일일 훈련 프로그램을 짰다. 송 박사는 자신이 고안하고 친구인 공학박사가 만들어 낸 실시간 ‘이동속도 측정장치’를 박태환의 몸에 붙여 손발 동작의 시간과 속도 데이터도 얻어냈다. 이 자료를 통해 송 박사는 박태환이 오른쪽 호흡을 할 때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현상을 발견해 영법 교정에 활용했다. 대세로 자리 잡은 전신 수영복 대신 반신복을 선택하게 된 것도 송 박사의 속도 측정 결과 반신복이 더 유리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기술 향상을 꾀하는 운동역학과 체력 향상을 꾀하는 운동생리학은 역도와 수영 이외의 종목에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학문이다. 양궁에서는 근전도 분석을 통한 근육 상태 조절, 고속촬영기를 통한 자세 교정, 자율신경계 검사를 통한 인체 에너지의 극대화 등을 실시했다.

배드민턴 대표팀은 연구원 구해모 박사의 민첩성 향상 분석 프로그램에 따라 선수별 특성을 파악했다. 소형 카메라를 경기 중인 선수들의 머리와 코트 등에 부착해 각 선수의 순간 대응력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구 박사는 김중수 현 배드민턴 대표팀 감독과 함께 ‘큰 시합에 나가는 선수가 부딪치는 심리적 문제’에 관한 논문을 쓰는 등 대표팀 코치진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유도를 담당한 연구원 김영수 박사는 외국 선수들의 경기력 분석을 도맡았다. 그는 체급별로 선수와 지도자가 선정한 7~10명의 경쟁 선수를 꼼꼼히 분석해 선수에게 대비책을 마련토록 했다. 대표팀 코치진과 함께 이 동영상 분석을 진행했다. 이번 올림픽 대비 과정과 그 결과는 10월 말 종합보고서로 발표할 예정이다. 김 박사는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 축적된 보고서는 대표팀에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대표팀 선수들은 운동심리학 분야 연구진과의 상담을 통해 심리적 부담감을 누그러뜨렸다. 이들 전문가는 개별 선수의 불안과 자신감·경쟁심리 등을 전체 선수단의 수준과 비교해 지수화했다. 이 ‘국가대표 심리검사’ 시스템을 통해 선수 자신의 객관적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자체 개발한 ‘휴대용 심리기술 메뉴얼’을 통해 시합에서 부딪칠 수 있는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감과 심리적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우리 대표팀에 첫 금메달을 선사한 유도의 최민호가 ‘3등 콤플렉스’를 떨치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신정택 박사였다. 최민호가 지난해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에 시달리자 신 박사는 정밀 분석을 거쳐 심리적 압박감이 그 원인임을 밝혀 냈다. 즉시 심리 치료에 들어갔다. 과거 시합이 잘 풀리던 기억, 훈련을 즐겁게 하던 기억 등을 떠올리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최민호는 올림픽 직전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올림픽 대비 기간 중 유도 대표팀은 심리 프로그램에 훈련시간 30분을 할애했다.

선수단 전체에서 자신감 지수가 가장 높았던 선수는 펜싱의 남현희였다. 신 박사가 남현희에게 내린 처방은 “너는 최고다”라는 말 한마디였다.

양궁 대표팀은 김병현 박사의 가이드에 따라 베이징의 양궁장과 비슷한 시설을 준비하고, 심한 소음 속에서 훈련하는 등 정신력·집중력 강화 훈련을 거쳤다.

김용승 박사는 태권도 선수들의 심리 상담 치료를 전담했다. 태권도 국가대표들은 우승을 당연시하는 주위의 기대 때문에 심리적 압박감을 가장 많이 받는 선수들이다. 그는 4명의 국가대표 선수 모두를 심층 면접해 각자가 처한 주위 환경과 성장 배경에 맞는 맞춤형 심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여자 67㎏급에서 금메달을 따낸 황경선은 특히 화려한 국제대회 경력으로 인한 주변의 기대가 높아 스트레스가 심했으나 김 박사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연구원의 현재 시설·인력 수준은 풀어야 할 숙제다. 100억원에 불과한 연구원 예산은 대부분 인건비와 유지비, 장비 수리비로 쓰여 최첨단 장비 도입이 어려운 실정이다. 16명에 불과한 연구원 숫자는 올림픽 참가 종목 수 25개에 한참 못 미친다. 정동식 연구관리처장은 “우리 연구원은 엘리트 체육을 뒷받침하는 사실상 유일한 기관”이라며 “지속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한다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