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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지 말고 흔들어라” 본드式 폼생폼사- 마티니 섞는 방식까지 바꾼 ‘007 시리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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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 07면

술·담배 같은 기호 식품의 소비에 따르는 쾌감은 맛과 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거기엔 폼이 따른다. 물론 그 폼이 얼마나 먹히느냐는 건, 연령대와 시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스무 살을 전후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담배를 엄지와 검지로 잡아 보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보고, 도넛을 만들어 보고, 입 밖으로 내보낸 연기를 코로 다시 빨아들여 보고 하면서 담배 맛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폼을 소비했던 것 같다. 지금은? 줄이자, 끊자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피우고 있는 마당에 폼을 의식할 여지가 별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런 기호 식품은 폼을 잘 잡으면 맛도 좋아진다는 것이다.

임범의 시네 알코올

액션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에게 이런 기호 식품을 소비하는 폼은, 그 캐릭터를 나타내는 기호가 돼버리기도 한다. 최근 ‘놈, 놈, 놈’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았던 마카로니웨스턴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기억하는지. 얇게 만 시가를 입술 중앙으로 가져가 문다. 그러곤 이빨로 살짝 씹으며 옆으로 굴려서 왼쪽 가장자리로 보낸다. 딱성냥을 꺼내, 옆에서 시비 걸고 있는 악당 똘마니의 뺨에 긁어 불을 댕겨 담배에 붙인다.

담배 말고 술로 폼 잡는 대표적 캐릭터는 007 제임스 본드이다. 1962년에 나온 007 시리즈 첫 편 ‘살인번호’에서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널리가 악당들의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자메이카로 갔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칵테일 셰이커로 흔든 술을 라임이 담긴 잔에 따르며 말한다. “미디엄 드라이 보드카 마티니입니다. 젓지 않고 주문하신 방식대로 섞었습니다.”

웨이터의 이 말은, 그때까지 술의 상식에 비춰 봤을 때 무척 튀는 말이다. 1) 젓지 않고(not stirred) 흔들었다(shaken)? 원래 마티니는 흔들지 않고 저어서 만드는 칵테일이었다. 2) 보드카 마티니? 마티니의 베이스는 보드카가 아니라 진이었다. 3) 미디엄 드라이? ‘드라이’는 ‘담백하다’, 즉 ‘달지 않다’는 의미이며, 진과 베르무트(와인에 알코올과 허브를 첨가해 만든 리큐어)를 섞어 만드는 마티니에서 이 표현은 대체로 베르무트를 거의 넣지 않거나 조금만 넣는다는 뜻이다. ‘미디엄 드라이’라면 베르무트의 양을 중간 정도로 넣었다는 말일 텐데, 이전까지 마티니의 유행은 ‘드라이’였다.

한 캐릭터가 아이콘이 되려면 이쯤은 돼야 하는가 보다. 마티니가 어떤 술인가. 지난 100여 년 동안 서구, 특히 영미권에서 가장 애용해 온 술이며, “소네트(14행시)만큼의 완벽함을 갖춘, 미국의 유일한 발명품”으로 불리기까지 했단다. 그 고귀한 술을 이렇게 제멋대로 마신다? 우리로 치면, 누군가가 인삼 찻집에 와선 인삼차 분말가루와 물을 따로 시켜 가루약처럼 분말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물로 삼키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과장이라고? 전통적 마티니 애호가들의 말을 들어 보자.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서머싯 몸은 진이 뭉개지지 않고 각 재료가 섬세하게 층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마티니는 흔들지 않고, 저어야(스터드, 낫 셰이큰) 한다”고 말했다. ‘드라이 마티니’에 대한 고집들은 한 술 더 뜬다.

헤밍웨이는 통상 3 대 1에서 5 대 1인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을, 15 대 1로 해서 마셨다. 존슨 대통령은 잔에 베르무트를 따랐다가 비워 버리고 그 잔에 진을 따라 마셨다. 나아가 처칠 총리는 차가운 진을 마시면서 베르무트 병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완벽한 마티니라고 했고, 히치콕 감독의 마티니 레시피는 진을 다섯 번 마시고 베르무트 병을 잠깐 흘겨보는 것이다.

유명 인사들이 뭐라 했건 상관없이 제임스 본드는 이어 나온 속편 영화들에서 “보드카 마티니, 셰이큰, 낫 스터드”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 결과 마티니 제조 및 음주 방식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언젠가부터 보드카 마티니가 기존의 진을 베이스로 한 마티니 못지않게 유행하게 됐고, 누군가가 마티니를 주문할 때마다 바텐더는 “저을 거냐, 흔들 거냐”를 묻게 됐다.

그런데 폼에도, 아니 폼일수록 유효기간이 있는 법. 73년에 나온 007 시리즈 8편 ‘죽느냐 사느냐’에서 첫선을 보인 2대 제임스 본드, 로저 무어가 임무 수행차 뉴욕에 갔다. 바에 들어가선 이렇게 주문한다. “버번 위스키와 물, 얼음 없이.” 배우도 바뀌었으니 술도 바꿔서 이미지를 새로 만든다는 전략이었을 텐데 ‘물 탄 버번’은 영향력도 폼도 물에 탄 듯 약했다.

첨단과 복고, 유행과 전통은 반복 상영되기 마련. 95년에 나온 ‘007 골든 아이’에서 제임스 본드로 첫 출연한 피어스 브로스넌이 몬테카를로의 카지노에서 다시 주문한다. “보드카 마티니, 셰이큰, 낫 스터드.” 한 번으로 부족한지 다시 복기시킨다. 같은 영화 안에서 제임스 본드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전 KGB 요원이 그를 두고 놀리듯 말한다. “본드, 재미있는 친구야. 뭐라더라? 셰이큰, 낫 스터드?” ‘골든 아이’는 6년이라는 오랜 공백 뒤에 나온 007 영화다. 제임스 본드가 돌아왔음을 환기시킬 말로 가장 적절한 게 바로 “셰이큰, 낫 스터드”였다. ‘터미네이터’의 아널드 슈워제네거 식으로 말하면 이건, “아임 백”이다.

2006년에 나온 007 영화 ‘카지노 로열’에서 제임스 본드의 바통을 이어받은 대니얼 크레이그는 더 복고로 치닫는다. 드라이 마티니를 주문한 뒤 웨이터에게 레시피를 가르쳐 준다. 진과 보드카와 ‘키나 릴레이’(화이트 와인에 과일주와 키니네향을 첨가한 리큐어)를 6 대 2 대 1로 섞어 얼음 넣고 흔든 뒤 레몬 껍질을 첨가하라고. 이건 007 영화가 아니라, 이언 플레밍이 쓴 첫 번째 007 소설 『카지노 로열』에 나오는 레시피다. 이렇게 만든 칵테일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자의 이름을 따라 ‘베스퍼’라 불려 왔는데, 그 재료 중 하나인 ‘키나 릴레이’가 86년에 생산이 중단됐다.

그럼에도 영화는 제임스 본드의 대사 안에 ‘키나 릴레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 이것 역시 일종의 선언으로 들린다. 이제부터의 007 영화는, 이국적 풍광을 노닐며 야들야들하게 멋 부리지 않고, 애초 007 소설이 읽혔던 분위기 그대로 비정함과 긴박감을 살려 정통 첩보 스릴러로 나아가겠다는. 그게 잘 먹힐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조금 느끼하게 “셰이큰, 낫 스터드”라고 말하는 제임스 본드의 폼과 유머는 이제 수명을 다한 모양이다.


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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