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후계자 '화궈펑(華國鋒)'의 본명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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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화궈펑의 모습


2008 베이징 올림픽은
덩샤오핑 개혁개방 30년의 성과를 대외에 알리겠다는
중국의 의지가 작용하는 행사입니다.

헌데 바로 그 30년 전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된 인물이 있지요.
마오쩌둥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됐던 화궈펑(華國鋒)이 그 주인공 입니다.

마오는 "네가 일을 한다면 나는 마음이 놓인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그의 사후를 화궈펑에게 맡겼습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이후
그해 4월에 총리가 됐던 화궈펑은 1976년 9월9일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엔
공산당중앙 주석과 군사위 주석에 올라 중국 1인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주장한 덩샤오핑 세력에 밀려 실각했지요.
화궈펑은 4인방 체포엔 공을 세웠지만 사상적 측면에서는 문혁의 이론과 정책을
지지했던 인물입니다.

흔히 '양개범시(兩個凡是)'로 잘 알려진
"무릇 마오쩌둥 주석이 내린 결정을 우리는 굳건히 지켜야 한다.
무릇 마오쩌둥 주석의 지시를 우리는 시종일관 받들어야 한다"는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주장을 펴다가 실각하고 만 것이지요.

헌데 이 화궈펑의 성은 원래 화씨가 아니더군요.
본명은 쑤주(蘇鑄)라고 합니다.
1938년 항일전쟁에 몸을 바치면서 이름을 바꿨습니다.

'중화항일구국선봉대(中華抗日救國先鋒隊)'에서
둘째, 여섯째, 여덟째 글자를 뽑아 화궈펑(華國鋒)으로 이름한 것이지요.
그런 그가 최근 병세가 위중해 베이징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올해 87세로 고령이긴 하지요.
덩샤오핑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그는 15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97년 개최) 때까지는 당중앙위원 신분을
유지했고, 국가 영도인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었던 사상이 失勢한 이후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서예에 침잠한 결과이겠지요.
덕분에 그의 붓글씨 수준이 대단해져 그의 글을 구하려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네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30년 선전장이기도 한 베이징 올림픽이 열기를 더해가는
요즘 화궈펑의 입원설이 또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상념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유상철 중국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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