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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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7세기 말까지의 왜왕들의 행적을 적은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와있는 이야기다.
백제계 민달(敏達)왕 때 일이다.일본사는 이 왕이 즉위한 해를 571년으로 꼽고 있다.이 무렵 백제는 위덕(威德)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어느날 고구려 사신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다.왕은 조정의문관(文官)들을 두루 모아 읽게 했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도읽어내지 못했다.
이때 왕진이(王辰爾)라는,외항선(外航船)의 서기가 나타나 척척 읽어냈다.
이것은 뭘 말하는가.
고구려왕이 보낸 국서는 한문체로 적혀있지 않고 고구려식 이두체(吏讀體)로 쓰여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당시의 왜 정권은 백제계가 쥐고 있었다.그것이 한문체 편지였다면 백제계의 쟁쟁한 문관들이 포진하고 있던 왜 조정에서 해독못했을리 없다.백제식 이두라도 매한가지다.
고구려식 이두와 백제식 이두의 표기법이 달랐기 때문에,백제계문관들이 고구려왕의 국서를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왕진이는,무역선이 들여오는 외래품에 세금을 부과하던 서기였다한다.그래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이두에 고루 밝았던 모양이다. 그 얼마후,고구려왕은 또 국서를 왜왕에게 보냈다.이번엔까마귀 날개에 쓴 붓글씨 편지였다.
까만 까마귀 날개에 까만 먹으로 쓴 붓글씨가 보일리 없어서,왜 조정의 고관들은 또 한바탕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왕진이가 다시 꾀를 냈다.밥을 지어 뜸 들일때 이 까마귀 날개를 밥 위에 올려 놓았다가 꺼내 그 위에 희고 부드러운 비단을 씌워 찍어 누르자 까마귀 날개에 쓰인 붓글씨가 탁본처럼 찍어졌다는 것이다.
역사대학에서 탁본 뜨기 공부를 했을 때,서을희여사가 들려준 에피소드였다.
우변호사와 함께 동해에 가 산소의 묘비 탁본을 뜬 날의 일들이 선명히 펼쳐진다.
매운듯 은은한 해당화의 향기와 더불어 첫 키스의 기억이 아리영을 휩쌌다.
-우 맥.대체 이 남자는 무엇이길래 내 영혼과 육신에 붙어 끝내 지워지지 않는가? 아리영은 밀물같은 그리움 앞에 곤혹과 고통을 함께 느꼈다.
변심을 깨닫게 한 우변호사의 약속 어김과 망설임,그 아내의 투기어린 도발.그런 가시덤불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멀리 달아나 봐도 도로 가시덤불에 닿고 만다.벗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더욱 곤혹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육신의 욱신거림이다.미스터조를 그리워했을 때만 해도 이런 괴로움은 없었다.
수목이 우거진 계곡에 물이 흐른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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