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에 올인한 헤지펀드의 비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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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31면

글로벌 헤지펀드들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 유가 하락 앞에서 속수무책이다.헤지펀드는 지난 6월 말 엄청난 돈을 국제유가 상승에 베팅했다. 블룸버그 데이터 베이스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세계 헤지펀드 자산 가운데 원유와 에너지 기업 주식 등 에너지 관련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5.6%에 달했다. 3월 말과 견줘 3.3%포인트나 늘어났다.

요즘 헤지펀드가 사들이는 자산이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에 비춰 에너지 관련 자산의 비중은 과도한 것이다. 헤지펀드들이 유가 상승에 올인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너무 주관적인 평가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좀 더 객관적인 기준에 비춰 헤지펀드들이 에너지 관련 자산에 얼마나 베팅했는가를 곱씹어보자. 미국 뉴욕증시의 S&P500지수 가운데 에너지 관련 종목이 차지하는 비중(시가총액 기준)은 12.7%다. 헤지펀드는 이 비중보다 2.9%포인트나 높게 에너지 관련 자산에 돈을 걸었다.

덤으로 헤지펀드들은 전체 자산 가운데 7.1% 정도를 금과 옥수수, 콩 등 다른 상품에 투입했다. 이들 관련 종목이 S&P500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8%밖에 되지 않는다. 헤지펀드 자산 구성이 균형을 잃고 에너지와 상품 관련 자산에 과도하게 투입됐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헤지펀드가 7월 한 달 동안 엄청난 손실을 봤고 8월에도 별반 나을 게 없어 보인다”고 미국 상품투자 자문사인 베스포크 인베스트먼트그룹은 최근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국제유가는 가파르게 미끄러지고 있다. 금 등 다른 상품 가격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헤지펀드들이 대거 베팅한 직후인 7월 11일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값은 배럴당 147달러에 이른 뒤 지난 주말에는 113달러대로 주저앉았다. 약세를 보일 것 같았던 미국 달러의 가치가 유럽연합(EU)과 일본 등 주요 경제권의 경제 후퇴 때문에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S&P500 지수에 편입된 에너지 관련 종목은 7월 1일 이후 지난 주말까지 17%나 추락했다. S&P500 지수 자체는 1% 정도 하락했을 뿐이다. 더욱이 일반 소비재 지수는 8% 상승했다. 헤지펀드들은 일반 가정에서 쓰이는 소비재들이 하찮아 보였는지 이들 자산을 거의 편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세계 헤지펀드들의 순자산은 7월 한 달 동안에만 2.8% 줄어들었다. 최근 5년 새 최악의 기록이다. 좋지 않은 뉴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8월 1~13일 사이에 헤지펀드 자산은 1.4% 더 줄어들었다.

헤지펀드라는 말은 시장의 변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을 담고 있다. 헤지펀드가 활용하는 투자 수단과 기법 하나하나는 전통적인 기준에 비춰 위험할 수도 있지만, 다양한 투자기법과 대중의 심리를 거꾸로 이용하는 대담성으로 시장의 변덕을 이겨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지펀드가 에너지 관련 자산을 과도하게 사들인 행위는 첨단 투자 수단이 아니라 사실상 군중심리에 편승하는 투기 펀드라는 점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 시장의 흥분과 침체를 역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덩달아 움직였다는 얘기다. 이는 개인 투자자가 직감으로 벌이는 직접투자와 다를 게 없다. 헤지펀드가 비싼 수수료 값을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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