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계인의 마음’ 훔칠 연합작전 짤 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5호 22면

지난달 14일 미국 뉴욕의 케네디 국제공항. 취재를 위해 칠레로 가는 항공편을 수속하는데 난데없이 “왜 비자가 없느냐”고 제지를 당했다. 한국과 칠레는 비자 면제 협정국이다. 황당해서 “무슨 비자냐. 처음 듣는 소리”라고 실랑이를 벌이는데 결국 책임자까지 나온 끝에 “봐라. DPRK(북한)는 칠레에 가려면 비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제야 오해가 풀렸다. 여권의 코리아란 글씨만 보고 북한 사람인 줄 착각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대한 바깥의 인식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를 생생하고도 쓰디쓰게 체험한 순간이었다.

지금은 ‘세계인의 마음’을 훔치지 않고선 기업도 나라도 번영을 꿈꿀 수 없다. 거센 세계화의 파고, 기호와 이미지를 먹고사는 소프트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다. 나라의 총체적인 매력도를 나타내는 ‘국가 이미지’와 ‘국가 브랜드’가 경쟁력의 중요한 밑천인 것이다.

브랜드는 라틴어로 ‘각인시키다’는 뜻이다. 이집트 벽돌공이 피라미드 돌에 이름을 새긴 데서 유래했다. ‘코리아’ 소리를 들을 때 외국인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뭘까.

뉴욕 공항의 해프닝처럼 현주소는 암담하다. 국가 브랜드 점수를 매기는 안홀트-GMI에 따르면 한국 브랜드의 순위는 현재 32위로 조사 대상 38개국 중 최하위권이다. 2년 전의 25위에서 더욱 미끄러졌다. 돈으로 따지면 한국 브랜드의 값어치는 5000억 달러(약 500조원)에 그친다. 미국(1경3000조원)의 발 밑 수준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대개 국가 브랜드를 따질 때 정부·문화·관광·기업·국민성·이민의 6개 항목을 본다. 한국은 그동안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라는 겉모습 홍보에만 치우쳤을 뿐 실제 국가 이미지를 높이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설문조사를 해보면 문화 쪽은 ‘한류의 힘’으로 10위권 안팎의 평가를 받지만 다른 부문에선 ‘정부가 불안정하다’ ‘배타적이다’ ‘별로 살고 싶지 않은 나라’라는 응답이 많았다.

외국인이 아직도 한국 하면 ‘과격 시위, 판문점, 전쟁’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탓에 기업들은 아예 국가 이미지와 상품이 격리되는 걸 원할 때도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로 보는 손해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주도면밀한 국가 브랜드 전략은 돋보인다. 2004년 말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선 자국 청년이 일본인 스시 명장에게서 혹독한 수련을 받아 장인으로 거듭난다는 TV 영화가 인기였다. 그 뒤 일류(日流)가 일었고 일본 상품이 잘 팔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소프트 파워’를 통한 국가 브랜드 제고책이다.

물론 우리도 3~4년 전부터 한류 덕을 짭짤하게 봤지만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다. 다로상(太郎さん) 스토리도 흥미롭다. 서양인은 일본인을 그릴 때 뻐드렁니에 나막신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사는 1980년대 초 미국의 만화가인 래넌 루리에게 새로운 일본인상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젊고 예쁘장한 다로상이 탄생했다.

뉴질랜드는 축복받은 자연에 초점을 맞췄다.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은 그린 뉴질랜드란 이미지를 세계인의 가슴에 심어 줬고 관광산업 발전의 촉매가 됐다.
이렇듯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데 써먹을 수 있는 자산과 작전은 무궁무진하다. 한국도 국가 브랜드를 전담해 통합 관리할 기구를 만들어 보다 다양한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 국민의 글로벌 민도(民度)를 높이는 프로그램과 1류 기업들의 브랜드, 그리고 국가 이미지를 연계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이런 일은 하루가 빠를수록 좋다. 이미 엄청난 브랜드 가치를 구축한 미국도 ‘재무장’을 외치는 판국이다. 지난해 말 캔자스주립대 강당에 모인 청중은 로버트 M 게이츠 국방장관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예상과 달리 그는 대부분을 국가 이미지에 대해 얘기했다. “이라크 전쟁에서 얻은 중요한 교훈의 하나는 이제 군사적인 성공이 승리의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지속가능한 경쟁력 우위’를 위해선 새로운 국가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미국이 2006년 ‘CSIS 위원회(Commission on Smart Power)’ 를 발족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 등을 주축으로 학계·관계·시민단체 인사를 모아 국가 이미지 제고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중국 가전 브랜드인 하이얼의 사례도 흥미롭다.

하이얼의 성공 이유는 가격 전략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발음 때문에 톡톡히 덕을 봤다는 분석이 나온다. 즉 착시효과를 통해 소비자에게 독일제라는 인식을 심어 줘 장사가 잘된다는 소리다. 국가 이미지는 소비자가 특정 국가의 물건을 살 때 드는 시간과 노력·걱정을 간단하게 해결하는 특급 도우미다. 이미지가 소프트 시대의 ‘국가 파워’고 자국민을 먹여 살릴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물리적 잣대로 국가 등수를 매기던 세상은 이렇게 ‘이미지의 승부’로 바뀌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