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2003년 ‘이민 100주년 행사’의 공동대표를 받으면서 미국 이민사를 정리했다. 어린 시절, 서씨에게 서재필 박사는 ‘금기’였다. 갑신정변 이후 일가가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광복 전까지 서씨는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광복 이후에야 ‘할아버지가 서재필 박사’라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1955년 미국 오리건대로 유학 온 서씨는 신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86년까지 신문기자 생활과 신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지금도 “나는 법조인보다 기자로 불리길 바란다. 내 피에는 잉크가 흐른다”고 말할 만큼 기자 직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다.
이 와중에 법대를 다니며 준비해 86년 변호사가 됐다. 70년 중·후반 한국 이민 쿼터가 늘어나면서 재미동포 숫자가 급격히 늘었다. 알고 지내던 목사 한 명이 “동포를 위해 영어를 잘 아는 네가 변호사가 돼 달라”고 요청해 군말 없이 따랐다. 그는 첫 변호를 맡은 사건을 아직 잊지 못한다.
막 이민 온 한국인이 미국 아이를 보고 “귀엽네. 고추나 한번 볼까”라고 했다고 아동 성추행 혐의로 기소됐다. 서씨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목회자를 수소문 끝에 찾았다. 그런 행동이 한국의 문화임을 강조했다. 결국 기소된 한국인은 무죄로 풀려났다.
서씨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온라인 족보 사이트를 완성하는 것이다. 사이트 이름도 정했다. ‘Korean family tree’다. 그는 “외국 생활 오래 하다 보면 뿌리는 자연스레 잊혀진다. 그래도 뿌리를 찾고 싶은 젊은이가 있다면 이곳에서 확인했으면 한다. 이걸 완성하고 죽고 싶다”고 말했다.
강인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