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中年>5.주부작가 이청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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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글쓰기」라는 작업을 통한 주부들의 자기표현 열기가 뜨겁다.
각 문화센터 문학교실마다 「원고지 안에서 나를 찾겠다」는 나이 지긋한 주부들로 만원이며,방송작가 연수원에도 대다수의 수강생이 여성들로 채워져있다.하지만 전업주부가 어느 날 작가로 등단,문단의 본격적인 평가를 받으며 무게있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소설가 이청해(李靑海.48)씨는 다른 사람 같으면 중견 소리를 들을 나이인 마흔세살에 데뷔,그간 두고두고 삭혀온 이야기들을 차분한 목소리로 실타래 풀듯 엮어내 눈길을 끄는 주부 작가. 91년 『세계의 문학』과 『문학사상』신인공모에 나란히 당선해 작가가 되었으니 경력 5년째의 신참인 셈이다.하지만 그간 단편집(『빗소리』)과 장편(『초록빛 아침』)을 한권씩 펴냈고 이달중 두번째 단편집을 내놓는 등 「뒤늦은 파이팅」 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니까 포물선의 정점에서 내려오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오데요.이렇게 시들어 버릴 수는 없다,한 사람의인간으로서 내 존재 의미를 찾아야겠다는 조바심이 들었어요.』 그의 「존재 찾기」는 당연히 문학으로 귀결됐다.대학 전공도 국문학이었고 잠깐이지만 여성지(『女苑』)기자,국어교사를 지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흔이 다 된 주부를 받아주는 곳은 정말 드물었다.
마침 아이(1남1녀)들도 웬만큼 컸고 결혼후 계속 살아온 대구에서 서울로 옮기게 된 것을 계기로 10여년만에 다시 펜을 잡을 수 있었다.그때가 80년대 중반.하지만 남다른 문재(文才)를 믿고 단숨에 작가가 돼보겠다는 자만심은 곧 좌절됐다.내는작품마다 최종심에서 탈락했던 것.『마음을 고쳐 먹었어요.등단이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호흡이 긴 작가가 되느냐는 게 더 중요하다는 각성이 오더군요.』 전업주부의 번잡한 일상속에서,아무도 「너는 꼭 작가가 돼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 상황에서,혼자만의 소설 공부가 시작됐다.현존하는 한국 작가의 중.단편을 집중적으로 읽었다.이청준의 『눈길』처럼 마음에 드는 단편은 1백번도 넘게 읽 었다.그러자 작품의 구성이며 작가의 의도가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였다.이렇게 3~4년을 보내고 나자 그간 직접겪거나 보고 들은 인생 이야기들이 구슬처럼 엮어졌다.그리고 연달아 당선.「뜸을 오래 들이다 나와서 그런지 쓸 게 없어 고 민해본 적은 없다」는 李씨의 소설은 중산층 주부들의 소외감(『초록빛 아침』)에서부터 요즘 학생들의 입시경쟁(『애니멀 세컨드』)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다루고 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만만치 않은 노동이라는 점에서 글쓰기란 작업이 쉽지는 않습니다.하지만 한 분야를 파고드는 끈기만있다면 나이든 여성이 뛰어들만한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지요.』 작가가 되고 난 후 무엇보다 갱년기 증상 등 소설 외적인 고민이 말끔히 사라져 좋다는 그에게선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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