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산불 이장이 잠든 주민들 깨워 살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강원도고성군 산불로 36가구 마을 전체가 초토화된 죽왕면삼포1리 속칭 군포마을에서 단 한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은 것은이마을 어명헌(魚命憲.37)이장의 투철한 책임감 덕택이었던것으로 밝혀졌다.魚이장은 화재가 발생한 23일 오후 면사무소직원 마을과 4㎞쯤 떨어진 군부대에서 산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달라』는 면직원의 당부를 받은 魚이장은 평소 오후10시쯤이면 잠자리에 드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이날은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자정 넘어서까지 쉽게 잠을 이룰 수없었다. 그러던 중 24일 오전1시쯤 방문을 여는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리만 느껴지던 불길이 마을 뒷산 너머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급해진 魚이장은 며칠 전 못에 찔려 통증이 심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90㏄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3백여에 이르는 마을 샛길을 질주하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빨리 대피하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魚이장의 외침에 잠을 깬 주민들은 바로 코앞에서 솟구치는 엄청난 불기둥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魚이장은 『이러다간 모두 죽고만다』는 생각에 주민들에게 가재도구는 모두 놔두고 앞마을로 대피하라고 다그쳤다.
『온통 아수라장이었습니다.불티가 수십미터씩 휙휙 날아다니는 급박한 상황에서 30~40대 가장들이 경운기에 노약자들을 태워우선 대피시키고 부녀자들은 잠이 덜 깬 어린 자녀들을 들쳐업고무작정 뛰었습니다.전쟁터도 이렇지 않을 것이라 는 처참한 생각이 들더군요.』 魚이장과 80여명의 주민들이 3백여쯤 떨어진 앞마을 산등성이에 도달했을 때 화마(火魔)는 마을을 집어삼키고계속 앞마을쪽으로 번지고 있었다.魚이장은 다시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5백여쯤 떨어진 삼포해수욕장으로 대피했다.
이때가 오전 2시쯤.거센 불길과 벌인 1시간의 사투(死鬪)가끝나는 순간이었다.94년부터 이장 일을 맡고 있는 魚씨는 『이장으로서 할일을 했을 뿐』이라며 『단 한명의 인명피해도 나지 않은 것은 내 가족 남의 가족 안가리고 노약자와 어린 자녀들을우선 대피시킨 마을 주민들의 협동심 때문』이라고 오히려 주민들에게 공을 돌렸다.
고성=홍창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