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4.11총선>2.돈선거 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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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대구시 관음동에 사는 주부 A(32)씨는 선거를 5일 앞둔 이달 6일 이웃집 아줌마로부터 오전6시에 『우리집에서 좀 보자』는 전화를 받았다.A씨가 의아해하면서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이웃집 여자는 『알재,잘 부탁한다』 며 다짜고짜A씨의 주머니에 3만원을 쑥 찔러넣었다.A씨가 당황해 『이게 뭐꼬,뭘 안단 말이고』라고 되묻자 그 여자는 『X번 말이다,X번』이라며 눈을 찡긋거렸다.후보의 인품이 어떻고 고향발전에 뭐가 도움이 된다는등의 얘기는 단 한마 디도 없었다.
무조건 돈을 주며 X번을 찍으라는 거였다.A씨가 사는 대구의한 선거구에선 그 「X번 후보」가 60억원을 썼다는 소문이 파다하다.선거막판엔 동네입구마다 X번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이 수십명씩 아예 진을 쳤을 정도다.
「돈은 묶고 입은 푼다」며 선거법까지 개정해 치른게 이번 15대 총선이다.그러나 이번 선거는 과거와 하나도 다를바 없는 「돈선거」로 규정돼야 할 것같다.여기저기서 드러나는 증거가 한둘이 아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역대 유례가 없는 금권선거』를 선언하고 나왔다.야당측의 주장은 물론 선거부진에 대한 책임을 호도하려는 정치공세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취재진이 확인한 바에 따르더라도 전국 곳곳에서 천문학적 액수의 향응제공.금품살포가 있었던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국민회의가 26일 오전 주장한 금권선거 사례들을 보자.
서울성동을과 구로을에선 신한국당 선거운동원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유권자에게 돈을 돌린 사실을 양심선언했다.경기도구리시와 청주흥덕 선거구에선 여당 선거운동원들로 보이는 자들이 돈을 돌리다 야당측에 적발돼 검찰에 구속됐다.또 충북청원에 선 모당 후보측이 지난 6일 아파트단지내에서 현금봉투를 돌리다 지방신문 기자에 의해 발각되자 다음날 새벽 보급소를 습격해 신문을 탈취해 갔다고 한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은 나라의 선거치곤 너무도 부끄럽다.자민련도 이날 당사 지하강당에서「전시회」를 했다.전시된 품목은 우산.운동복.스카프.여자 화장품등 제각각이다.전부가 신한국당 후보들이 유권자 에게 뿌린 금품의 증거물이라는게 자민련의 주장이다.
***與野 .도토리 키재기' 야당도 마찬가지다.신한국당측에선『검찰에서 수사를 받고있는 야당후보들을 보라.야당도 엄청난 금품살포를 했다』고 주장한다.
「도토리 키재기」.어찌보면 50~60년대의 고무신.막걸리선거를 손가락질할 처지가 못된다.고무신이 화장품이나 운동복으로 바뀌더라도 본질은 똑같기 때문이다.우리 정치의 한심한 현실이다.
서울지역에서 낙선한 B후보가 쏟아부은 돈의 내용을 추적해보자.공천을 받자마자 이 지역의 기초.광역의원들 몇몇이 찾아왔다.
그들은 점잖게 『도와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실탄이 좀 있어야겠다』고 운을 뗐다.이들에게 1인당 5백만원씩 3천만 원이 들어갔다. 10개 동의 협의회장들에게 5백만원,40여개 선거구의 지역장들에게 2백만원,80여개 관리장들에게 1백만원씩 2억여원이들었다.공천을 받은 직후 당원들과 인사를 하면서 1번,공식 선거운동에 들어간뒤 다시 1번,마지막으로 선거직전에 1번등 모두3번을 돌렸다.이 돈만 6억여원이다.
『7천만원을 들여 지구당 개편대회를 했고 6천만원짜리 홍보 비디오도 만들었습니다.남들이 다 하는데 나혼자 안할 수도 없는것 아닙니까.』 B위원장의 말이다.홍보물 만들고 선거운동원 2백여명에게 일당 주고,부녀자들에게 점심대접하고….
B 후보는 그런식으로 이번 총선에서 모두 9억여원을 썼다.
***지방의원까지 손벌려 『선거란게 하나부터 끝까지 다 돈입디다.여기저기서 있는돈 없는돈 다 끌어다 지역구에 싸바르는게 선거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B후보는 자신이 상대후보보다 못나서 낙선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20당(當)10락(落)」인데 자신이 10억원밖에 못써서 떨어졌다고 믿는다 후보가 돈을 쓰는건 그게 먹히기 때문이다.『아파트 주부들이 의식이 높아 돈선거가 안먹힌다고 누가 그럽디까.잘살고 배웠다는 사람들이 더해요.
고기도 불고기는 안먹고 생갈비만 좋아한다니까요.』 서울에서 당선된 신한국당 C후보의 말이다.
***본전 뽑으려 뭘할지… 현실이 이런데 정작 선관위는 무사태평이다.선거때마다 연인원 수만명을 동원해 단속에 나선다는 엄포를 놓지만 본때있게 「돈선거」를 적발해내지 못했다.
취재기자들은 합동연설회장에서 우르르 빠져나가는 청중들을 뒤쫓아가 돈주는 현장을 여러차례 목격했었다.한데 그런 현장에서 선관위 직원들은 한번도 발견할수 없었다.겉치레 단속이란 비난이 쏟아지는게 당연하다.
후보들이 수십억원씩 쓰는 마당에 선거비용을 8천만~9천만원으로 묶어놓은 눈가리고 아웅식의 선거법,돈만 쓰면 무조건 선거에서 이긴다고 생각하는 후보들,엉터리 선거감시,「쥐약」을 풀면 넙죽넙죽 받아먹는 유권자들.이 모든 것의 종합이 결국 이번 총선의 「돈선거」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당선된 인사들이 그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지는 뻔하다.본전을 뽑을 것이란 말이다.각종 이권에마구잡이로 개입하고 이돈 저돈 가리지 않고 받는게 다음 수순이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다.그러다보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유권자에게 돌아올 것이다.악순환이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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