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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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소박한 연주황빛 토기 항아리와 어울려 아네모네가 더욱 선연했다. 『아름다운 항아리예요.가야(伽倻)토기인가요?』 『아닙니다.일본 오카야마(岡山)에서 출토된 것인데 4세기께의 항아리로 보입니다.가야 토기와 흡사해 보이지만 조사 결과 기비(吉備)지방 흙으로 빚어진 사실이 밝혀졌지요.기비(きび)는 오카야마의 옛 이름입니다.』 콕 로빈이 자상하게 대답했다.
『오카야마!』 아리영은 그 고장을 잘 기억하고 있다.일본서 근무하던 시절 아버지는 주말을 이용하여 어머니와 어린 아리영에게 오카야마 구경을 시켜준 적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구경거리가 있던 것은 아니다.그러나 오카야마는 압도적인 모습으로 아리영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그 고장의둘레 산꼭대기에 굽이굽이 쌓아 이어놓은 거대한 바윗돌 무더기.
고대 산성(山城)의 모습이다.
어른의 키보다 훨씬 큰 네모 바윗돌을 포개 올려 쌓은 긴 성벽이었다.
『산의 능선(稜線)을 따라 큰 바윗돌로 이어서 짓는 이런 산성을 일본사람들은 「조선식 산성」이라 부르고 있지.우리나라 특유의 고대 산성이거든.』 아버지가 설명했다.
『그럼,우리 고대인이 여기 와서 이 산성을 지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어머니가 물었다.
『그렇지.백제가 멸망한 다음 신라와 당나라가 왜로 쳐들어올까봐 백제 사람들이 방비했다는 것인데 4세기에 이미 지어놓은 것을 7세기에 다시 늘려 쌓은 게 아닌가 추측된다더군.』 험한 산길은 아니었으나 초등교생이었던 아리영을 위해 아버지.어머니는천천히 걷고 있었다.신록(新綠)의 나무 향기가 싱그러웠다.
『그 옛날,이런 산중에 뭣때문에 누가 왔을까요.』 논리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어머니의 성격이었다.
『주로 가야.신라 사람들이 무쇠를 찾아 여기에 와서 살았던 모양이야.저 산 아래 강에서 사철(砂鐵)이 많이 건져졌었지.특히 가야 사람들의 제철 기술은 대단했거든.그래서인지 아직까지 이 오카야마 근처엔 「가야」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대.』아버지는 아리영이 알아듣도록 쉽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떠나온 조국 이름을 자기 성(姓)으로 삼았었군요.』 어머니는 감격스러워 했다.눈물기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릴 것만 같다. 그 「가야」씨의 아들이 색목인(色目人)의 모양새로 아리영앞에 앉아 있다.불가사의한 인연이 아닌가.
방 한 구석에 하얀 실크 커버를 씌운 침대가 보였다.저도 몰래 긴장이 되면서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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