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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본사후원사이 톰블리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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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하얀 벽지에 어린애가 연필과 크레파스로 찍찍 그려놓은 낙서 같은 그림이 있다.
어떤 형태도 없고,그렇다고 어떤 패턴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휘갈겨 끼적거린 글씨와 실수로 묻은 잉크자국 같은 것도보인다. 일반인들이 보면 『내가 더 잘 그리겠다』라는 말이 툭튀어나올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그림이 전세계 생존작가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싸다.
그만큼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다.도대체 이 작품은 누구의 것일까.
현대미술사전에 「특정한 미술 경향으로는 규정지을 수 없는 미국화가」라고 씌어 있을 정도로 한마디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사이 톰블리(68)가 바로 그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 로마에 머무르면서 일체의 외부 접촉 없이 오직 작품활동만 하는 작가 사이 톰블리.
미스터리에 가득 찬 이 작가의 국내 첫 작품전이 본사 후원으로 서울소격동 국제화랑에서 19일부터 열린다.
뉴욕 근대미술관(MOMA).휘트니미술관.바젤 쿤스트미술관에서초대전을 가진 바 있고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마련되는 이번 전시에선 문학적인 상징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는 60년대 작품이 소개된다.
1백호 이상의 대작 7점등 모두 사이즈가 큰 작품들이다.
이 가운데엔 톰블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3월의 이데스(Ides of March.3월8일이라는 뜻)』와 『야경꾼』도 포함돼 있다.
62년작 『3월의 이데스』는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하는 로마의 역사적 사건을 격정적인 선으로 그려낸 작품이고,66년작 『야경꾼』은 렘브란트의 동명 작품을 톰블리가 검정 캔버스 위에 간결한 흰색만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로마에 정착한 57년 이후의 작품들은 현지의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아 역사와 문학,신화에서 상징적 기호를 따온 것들이 많다.
50년대말과 60년대초 톰블리의 작품은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60,64년 큰 기대를 안고 고국 미국에서 의욕적으로 개인전을 열었다.뉴욕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열린 두번의 전시 결과는 기대이하였다.
당시 미국은 소비사회의 이미지를 차용한 팝 아트와 엄격한 비례를 중시한 미니멀리즘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톰블리의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낙서같은 작품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됐다.
70년대 들어 신표현주의 물결을 타고 비로소 재평 가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승과 하강의 주기에도 톰블리는 일생동안 일관된 작품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로마에 정착하기 전인 50년대엔 즉흥적인 낙서같은 작품,60년대엔 상징과 기호를 담고 있는 작품,60년대말엔 상징은 사라지고 링을 늘려 놓은 것처럼 이어지는 선묘,70년대엔 다시 상징성 있는 작품,70년대말엔 대담한 색채의 등장.
이처럼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 기간을 떼내어 절정기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일생의 모든 작품이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주류에 묻히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통해 또하나의 현대미술 흐름을 만들어낸 시적인 톰블리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전시는 5월19일까지 계속된다.(02)735-8449.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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