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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발레, 굴착기와 춤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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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장중한 음악이 흐른다. 비장미까지 넘친다. 순간, “삐-익”하는 굉음과 함께 기계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거대한 인공 팔처럼 덜컥덜컥 움직이는 모습이 위압적이다. 마치 포효하는 공룡처럼 무언가를 집어삼킬 듯하다. 밑엔 아리따운 여성이 홀로 있다. 기계가 그녀를 덮쳐온다. 위기일발이다. 그때, 기계는 멈칫한다. 무언가 사색하는 듯하다. 그리고 버킷(흙을 담는 부분)에 여성을 태운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감싸안고는 멀리 떠나보내려는 듯 아련하게 움직인다. 괴물과 미녀의 사랑, ‘킹콩’을 연상시킨다.

영화의 한 장면? 아니다.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몬스터 발레’의 한 대목이다. 차가운 굴착기와 우아한 발레의 만남, 세간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굴착기의 달인, 발레에 취하다

‘몬스터 발레’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 여름축제 중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9일 밤 9시부터 나흘간 여의도 부근 한강변에서 매일 30분간 공연된다. 하이 서울 페스티벌은 서울시가 주최하는 행사다. ‘인원 동원’ 혹은 ‘전시 행정’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관변 축제에 ‘몬스터 발레’와 같은 도발적인 예술 융합이 시도된다는 건 이례적이다.

‘몬스터 발레’를 위해 가로·세로 각각 21m의 간이 무대가 설치된다. 굴착기는 4대다. 작은 건 14t, 가장 큰 건 30t에 이른다. 굴착기는 무대 밑으로 들어가, 팔만 무대 위에서 움직인다. 로보캅처럼 뚝뚝거리며 움직이는 굴착기와는 별도로, 무대엔 국립발레단 소속 9명의 무용수와 아크로바틱 전문 무용수 한 명 등 모두 10명이 자신만의 춤사위를 보여준다.

굴착기를 조종하는 건 모두 볼보기계건설 직원들이다. 특히 리더를 맡고 있는 이정달(41)씨는 국내 유일한 굴착기 데몬스트레이터(demonstrator)다. 해외 바이어 등을 상대로 굴착기의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시연을 하는 게 그의 주업무다. 굴착기로 축구·농구는 물론, 달걀도 움직이며 붓글씨까지 쓸 줄 안다. 그는 “손발 쓰는 것만큼 편하다. 운전을 하다 보면 굴착기가 몸통·허리·엉덩이가 달린 신체랑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발레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단다. 그는 “어떠한 정밀한 움직임도 자신 있었는데, ‘슬픔을 표현해 보자’란 감독의 지시엔 눈앞이 캄캄했다. 이참에 새롭게 교양 쌓고 있다”며 껄껄 웃었다.

#기계 문명이 자연을 복원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노 김용걸(35)씨가 안무를 맡는다는 점도 색다르다. 그는 현재 파리 오페라 발레단 솔리스트다. 세계 최고의 발레단에서 유일한 아시아 남자 무용수로, ‘발레계의 박찬호’라 불리는 그가 고국에서 첫 안무 작품으로 ‘몬스터 발레’를 택한 건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나는 지금껏 늘 극장 안에서만 작업해 왔다. 한강변에서, 그것도 낯선 기계와 함께한다는 점이 나를 유혹했다. 생소하지만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굴착기는 현대 기계문명을 상징한다. 예술감독인 로저 린드는 “우린 기계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문득 개념 미술의 시초인 마르셀 뒤샹의 ‘변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또 “한강은 과거 서울 시민의 생활터였다. 그런 한강이 기계문명에 의한 개발로 인해 시민들로부터 멀어졌다. ‘몬스터 발레’는 그 간격을 좁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결국 ‘몬스터 발레’는 자연을 파괴한 기계를 역으로 이용해 자연을 복원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과연 육중한 굴착기는 무엇을 말할지, 괴이한 무대가 서울시민에게 다가오고 있다. 02-774-4053

글=최민우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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