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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비무장지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52년 5월 주한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마크 클라크장군의 마지막 임무는 휴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일이었다.다음해인 53년 7월27일 월요일 오후였다.바로 그날 오전 10시1분부터 12분간에 걸쳐 유엔군사령부의 윌리엄 해리슨중 장과 북한측의 남일(南日)은 쌍방이 준비한 18개 문서에 서명했고,한국어.영어.중국어로 작성된 이 문서들은 최종서명을 위해 비슷한 시간에 클라크장군과 김일성(金日成),그리고 펑더화이(彭德懷)에게넘겨졌던 것이다.
이 역사적 휴전협정의 서명을 앞두고 파커만년필회사는 기민한 상혼(商魂)을 발휘,클라크장군에게 자사 제품의 최고급 만년필을선사했다.그러나 장군은 문서를 앞에 놓고 한동안 착잡한 표정을짓다가 만년필을 한옆으로 치우면서 이렇게 말했 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그 희망은 앞으로의구제수단이 끊임없는 경계와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란 인식과 함께소멸돼야 한다.』 클라크장군의 이같은 술회는 한국 국민 대다수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북한 권력구조의 속성으로 미루어 휴전협정과 함께 형성된 비무장지대는 언제,어떻게 폭발할지 모를 시한폭탄으로 한반도를 끊임없이 위협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0여년 후인 66년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박상호(朴商昊)감독의 영화 『비무장지대』는 비무장지대 안에서 길을 잃은 두 남녀 어린이의 행적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조명한작품이다.이 영화의 기본 메시지는 비무장지대가 「전쟁속의 평화」와 「평화속의 전쟁」이란 두 얼굴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희귀식물의 보고(寶庫)」나 「민물고기의 낙원」등 생태계보존지역으로서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한 모습과 북한의 계속된도발로 긴장상태가 끊이지 않는 또다른 모습이 바로 현실적인 비무장지대의 두 얼굴이다.
이번 북한의 「규정 준수 거부」선언도 휴전협정에 가려진 호전성의 진면목을 드러낸데 지나지 않는다.하지만 협정당시 클라크장군이 술회했던 것처럼 우리가 끊임없는 경계와 노력으로 구제수단을 비축해 왔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결국 휴전협정 은 그 자체가 평화도 아니요,희망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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