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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로 주고 말로 받는 ‘불패’의 교섭력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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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6자회담에 참여한 현재의 북한 협상팀은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진용을 갖췄다. 협상의 최고결정권자는 물론 김정일 위원장이다. 외부세계와 협상할 때 김 위원장은 엘리트 외교관들을 대리인으로 파견한다.

북한은 90년대 초반부터 15명 정도의 외교관을 ‘미국 전문가’로 육성해 왔다. 다수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미국의 정치나 문화에 정통하다.

협상전략을 총괄하는 인물은 90년대의 핵위기 때 수석대표를 맡았던 강석주 제1 외무성 부상. 줄담배를 피우며 성깔이 있기로 알려진 강과 대조적으로 현재 수석대표를 맡고 있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냉정하고 인내심이 강하다.

전에는 항상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하지만 최근에는 대미협상이 잘 진척되는 탓인지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북한 제일의 미국 정책통은 유엔대표를 지낸 이근 외무성 미주국장이다. 유머가 풍부하지만 강경 발언을 하고 때론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대화하는 서글서글한 면도 갖췄다.

대외협상을 담당하는 멤버는 90년대부터 거의 변하지 않고 핵문제의 역사적·기술적 문제나 미국 외교를 꿰뚫어보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 측 협상팀은 부시 정권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사퇴한 사람도 많아 90년대에 북·미협상에 참여했던 사람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북한은 2006년 핵실험을 실시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사진은 그 뒤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를 결의하자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북한의 박길연 유엔 대사.

지도부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들을 뽑아 협상팀을 구성하지만 그럼에도 매우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협상단에 별로 재량권이 없는 것이다. 비즈니스 등에서도 협상자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이 주어지지 않으면 현장에서 교착상태를 타개하거나 창의력 넘치는 타협안을 내놓기 어려워진다.

북한은 협상할 때 감시자로 노동당이나 군 간부가 따라붙어 김 외무성 부상 등의 언동을 예의 주시한다. 외국에서 협상할 때는 북한 대사관에 있는 문서 암호화 팩스를 통해 평양의 지도부와 바지런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그것이 의외의 형태로 효과를 보는 측면도 있다. 협상에서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금물이다. 필요 이상의 정보를 은연중 흘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개인 자격 발언을 엄격히 제한하는 반면 6자회담의 미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차관보는 회담 중간에 기자단의 질문에 정중히 응했다. 결과적으로 뜻하지 않게 북한 측에 필요 이상의 정보를 넘겨줘 힐은 미국의 관계자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의 방식은 매우 위험하다”고 오하이오 주립대의 레위키가 말했다. 거꾸로 북한은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상대방이 진의를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

6자회담 때도 핵개발 능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아 미국 등은 우라늄 농축계획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시리아에 어느 정도까지 핵 협력을 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상대국은 북한이 어느 시점에서 어떤 흥정을 하고 어떤 대가를 원할지 등을 놓고 늘 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북한은 협상 파트너의 연구에도 여념이 없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는 상대에 관한 지식을 회의장에서 흡수하는 일”이라고 IMD의 와트킨즈가 말했다. “실제로 테이블에 앉을 때까지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

1993년 8월 제네바에서 열린 북·미 협상에서 미국 대표단은 ‘친목’을 위해 와인과 치즈 파티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북한은 ‘은밀한 공작’을 벌였다. 미국 측이 담소하는 동안 북한 외교관은 한 사람씩 미국 측 협상자를 맡아 제각기 접근해 똑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목적은 미국 측 협상자의 답변을 나중에 대조한 다음 협상팀의 불일치점을 발견해 미국의 속셈을 파악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상대를 연구해 전략을 수정한다. 상대의 수법을 배워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한다”고 북한 협상팀과 수 년간 절충해 온 케네스 키노네스 전 국무부 북한 분석관이 말했다.

동시에 북한은 협상을 통해 상대방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를 포착해 내부 분열을 유도한다. “미 대표단의 팀워크가 탄탄한지 의견이 다른 점은 없는지 등을 찾는 것이 북한의 변함 없는 수법”이라고 키노네스가 말했다.

반면 북한 측은 엄격한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상당히 규율이 잡혀 있다. 아무도 경계선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고 아인혼이 말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는 법이 없다.”

대체로 협상할 때는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 차례 회동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모두 참여하는 공식 회의 말고도 부속 회의, 비공식 회동을 통해 서로 자신의 진짜 의도를 자유분방하게 이야기하면서 합의점을 찾기도 한다.

이럴 때 북한이 자주 구사하는 전술 중 하나가 이른바 ‘좋은 경찰, 나쁜 경찰’ 수법이다. 북한의 경우 매파인 군과 비둘기파인 외무성이 대립하는 듯한 인상을 상대에게 심어주려 한다.

“국무부는 북엔 강경파와 개혁파가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CIA(미 중앙정보국)의 브루스 클링그너 전 한국문제 분석가가 말했다. “그들은 미국이 양보해서 개혁파에 도움을 주면 강경파의 기를 꺾어놓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자동차 세일즈맨의 예를 들어보자.

“손님께는 싸게 드릴게요. 하지만 상사가 할인해서 파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돈을 좀만 더 쓸 의향이 있으시다면 어떻게든 상사를 설득해 볼 수 있을 텐데.”

점원은 그 자리에 손님을 남겨두고 사무실로 들어가 상사와 웃으며 손님에게서 돈을 짜낼 방법을 의논한다. 그 뒤 넥타이를 풀고 얼굴에 물을 끼얹은 다음 손님에게 돌아와 말한다. “애를 써봤는데 조금만 더 가격을 올려주신다면 상사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일종의 게임”이라고 클링그너가 말했다. “그러나 미 정부 고관도 전문가도 계속 말려들기 때문에 아주 효과적인 수법이다.”

협상 과정이 중반에 접어들면 북한은 상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행동을 하거나 과거의 해묵은 문제를 다시 끄집어낸다. 협상의 지연이나 혼란 조성이 목적이다. 좋은 사례가 마카오 은행 방코 델타 아시아(BDA)에 대한 금융제재를 둘러싼 북한의 태도다.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겨냥한 공동성명이 채택될 무렵 미 재무부는 BDA의 북한 관련 계좌를 동결하는 금융제재를 발동했다. 북한은 격분해 제재가 풀릴 때까지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핵문제와 무관하다’는 이유로 일본인 납치문제를 6자회담 의제로 채택하지 않은 반면 핵문제와 무관한 BDA 문제를 협상재료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핵화 협상을 1년 반 가까이 지연시켰다.

무관한 문제나 과거의 잘못을 꺼내는 것은 부부싸움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수법이다. “이미 종결된 문제며 합의를 봤다고 해도 북한은 그것을 다시 들춰내곤 한다”고 아인혼 전 국무차관보가 말했다.

이런 인식 격차는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부분도 크다. 노스웨스턴대의 브렛에 따르면 미국의 많은 비즈니스맨은 하나의 문제를 여러 가지 요소로 분할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아시아인은 모든 문제를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문제를 잘게 나누면 협상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다. 난제가 뒤로 미뤄져 거래의 재료가 없어진다”고 브레트가 지적했다. “어떤 문제에 대국적으로 접근하는 아시아인들의 사고방식이 협상에 적합하다.”

더욱이 북한은 협상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벼랑 끝 전술을 취해 유리한 입장에 서려 한다. 위기를 부채질하는 목표 중의 하나는 협상 가격을 올리려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북한에 하지 말라고 할 때마다(가령 재처리용 핵연료봉의 제거나 미사일 시험발사) 북한은 기를 쓰고 더 했다고 미국 외교관계자들은 말했다.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개발한 것도 미사일 협상에서 더 많은 대가를 받기 위해서”라고 키노네스가 말했다. “미국 정부가 미사일 생산을 중단하라고 북한에 말할 때마다 가격이 올라갔다.”

BDA 제재에 반발해 6자회담 복귀를 거부한 북한은 2006년 7월의 미사일 발사와 같은 해 10월의 핵실험으로 더욱 긴장을 고조시켰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부시 정권이 이라크 정책의 실패로 낮은 지지율에 허덕이고 있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부시 정권은 2007년 2월 6자회담을 북한에 유리한 쪽으로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이런 성과를 올린 것은 자국과 미국의 BATNA를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ATNA를 파악하고 있으면 상대가 태도를 누그러뜨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상대가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면 자신의 방침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고 오하이오 주립대의 레위키가 말했다.

“한쪽이 시종일관 강경한 자세를 보인다면 다른 한쪽은 합의할지 말지는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는 압박을 받는다.”

일본에는 이런 수법이 먹힌 듯하다. 이런 지연전술은 단순히 시간을 끌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래 봤자 북한 측에 이로울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적에게 조금씩 미묘하게 압박을 가하려는 포석이다.

북한은 5년여 전부터 납치문제는 “이미 해결됐다”고 주장하며 협상을 거부해 왔다. 그 결과 지금은 일본의 외무상조차 일본도 양보할 필요가 있다는 소리를 한다. 예전의 강경한 자세를 생각하면 커다란 변화다.

협상 과정이 종반에 접어든 시점에서 북한은 이미 상대를 초조하게 만들어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다. 합의를 명문화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책임은 모호하게 놓아둔 채 상대에게는 명확한 언질을 요구한다.
90년대 후반 이후의 북·미 협상에서도 북한은 이런 수법을 구사했다.

2000년 10월, 미사일 수출·제조의 규제에 관한 합의 실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가운데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역사적인 회담을 했다. 국무차관보로 수행한 아인혼은 북한의 고관과 미사일 문제를 협의했다. 합의에 근접했지만 수출규제에 관한 조건이 모호했다.

규제대상에 모든 미사일이 포함되는가, 일정 비거리의 미사일만 해당되는가? 그 점을 분명히 하려 했지만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국방위원장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정일도 명확한 답변을 해 주지 않았다.

한 주가 지나 아인혼은 쿠알라룸푸르에서 북한의 고관과 회담했다. “그쪽의 입장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모호한 점을 명확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북측 고관은 “국방위원장을 모욕하느냐”며 발끈 성을 냈다.

“왜 모욕이 되느냐”고 묻자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국방위원장의 입장은 명명백백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클린턴 정부의 임기만료가 임박한 탓에 협상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어떤 협상에서든 누구나 상대방의 의무는 명확히 규정하고 자신의 의무는 대충 넘어가려 한다”고 아인혼이 말했다. “북한의 경우만 그런 게 아니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6자회담의 미국 측 수석대표인 힐은 이런 점에서 실패했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금융제재 해제와 에너지 지원 등 구체적인 약속을 이끌어냈다. 그에 대해 북이 영변의 핵시설 무력화 외에 약속한 것은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뿐으로 그 내용은 지금까지 불완전하고 모호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북한은 더 많은 요구를 늘어놓을 것이다. 협상의 진전이 늦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은 앞으로의 협상에서 북한의 핵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검증수순을 밟으려 한다.

하지만 북한은 대규모의 검증을 ‘국가주권의 침해’라며 거부한 전력이 있다. 한편 북한은 경수로 제공 등 불가능한 요구를 다시 꺼내 인정해 주지 않으면 협상의 진전을 늦출지도 모른다.

거대한 다국적기업이라도 협상 상대인 중소기업을 우습게 여기면 큰코다칠 수 있다. 체면 가리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상대는 얕잡아보지 않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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