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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南農 추모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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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전남 진도(珍島) 운림산방(雲林山房)은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자리를 차지한다.조선후기 남종화(南宗畵)의 대가(大家) 소치(小癡) 허유(許維)가 이 곳에서 말년을 보낸 때문이다.운림산방현판(懸板)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썼다.
1809년 진도에서 태어난 소치는 초년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화첩(畵帖)을 통해 그림을 익히고,이어 해남 대흥사(大興寺) 초의선사(艸衣禪師)밑에서 그림을 공부했다.후에 초의가 추사에게 소치의 그림을 보여준 것이 인연이 돼 서울에 와추사의 제자가 됐다.
소치는 산수.인물.노송(老松).괴석(怪石)을 두루 잘 그렸다.추사는 소치의 그림을 『화법(畵法)이 동인(東人)의 누습(陋習)을 벗어나 압수(鴨水.압록강)이동(以東)에선 그 유(類)가절무(絶無)하다』고 극찬했다.소치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둬 그중막내인 미산(米山) 허영(許瀅)이 대(代)를 이었다.미산은 산수.노송을 잘 그렸으나 『소치그림의 진수(眞髓)는 미득(未得)한 것』으로 평가된다.
운림산방 3대는 남농(南農) 허건(許楗)이다.오랫동안 목포에서 살았다.광주 무등산(無等山)에 살았던 같은 허씨 일문(一門)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과 함께 호남화단(畵壇)의 양대산맥을 이뤘다.의재는 남농보다 16세 연상으로 미산에게서 그림을 배우고,일본에 유학해 정통 남종화를 익혔다.그는 일생 정통 남종화의 엄격한 화격(畵格)을 고수했다.
남농은 의재와 달랐다.남종화의 관념위주에서 탈피,실제 풍경을사실적으로 담는데 애썼다.자신이 살던 유달산(儒達山)아래 논밭.다도해(多島海)풍경.노송을 즐겨 그렸다.그는 제자들에게 남종화의 기(氣)를 물려주는데는 엄격했으나 기(技) 를 강요하지는않았다. 남농은 수석(壽石)수집가로도 유명했다.그가 세운 수석관은 목포의 명물이었다.지난 81년 남농은 자신이 소장해온 서화.골동.수석등 약2천점을 목포시에 기증했다.
87년 11월5일 남농은 세상을 떠났다.향년 80.그로부터 9년 세월이 지난 오늘 남농은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서울 인사동 한 화랑에서 「남농추모전」이 열리고 있다.유작 50여점이 전시중이다.남농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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