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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가는길>전남구례 구층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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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의상(義湘)대사가 신라 문무왕 10년(679년)에 화엄사를 중수하고 터를 잡았다는 구층암(九層庵).그 암자 가는 길의 첫번째 정취는 계곡의 멋을 심안(心眼)으로 느끼는 일일 것이다.
결코 허둥지둥 서두르지 말 일이다.자연의 무심한 소리지만 문득 물소리,바람소리에서도 잔단한 기쁨을 느낄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계곡길을 걸을 때는 음악의 무슨 기호처럼 「천천히,그러나 느리지 않게」가 좋다.
계곡의 흐르는 물에 눈과 마음을 맑게 하면서.
그렇게 걷다 보면 이윽고 화엄사 일주문이 나온다.바로 거기에서부터 웅장한 화엄사는 전개된다.
구충암 가는 길의 두번째 정취라고나 할까.
가까이에서 화엄사를 만나 절의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법열에 잠겨보는 것도 큰 기쁨이다.
금강문(金剛門)을 지나 다시 오르면 천왕문(天王門).거기에는험악한 표정의 조형물들이 있는데,소위 불법(佛法)과 절을 지키는 사천왕이다.
속세로 말하면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들인 것이다.
그들이 눈을 부릅뜨고 상주하는 것은 화엄사의 눈부신 성보들을지키고자 함이 아닐까.
보제루 정면 위쪽에 대웅전(보물 299호),아래쪽에 동오층석탑(보물 132호),서오층석탑(보물 133호)이 있고,왼편 위쪽에 각황전(覺皇殿. 국보 67호)과 석등(국보 12호),그리고 동백나무 숲길 끝에 쌍사자석탑(국보 35호)등 이 있는 것이다.화엄사가 빛이라면 구층암은 절의 그림자 같은 곳이다.자세히 보면 새록새록 정이 들고,선방(禪房)암자로서 군더더기가 없는 느낌이다.
암자 뒤편 기둥들은 그 크기가 각기 다른데 함부로 산을 깎아집을 짓는 요즘 사람들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한줌의 흙도 그자리에서 덜어내지 않고 암자를 지었던 선인들의 자연에 대한 겸허함이 아닐까.뿐만 아니라 매끄럽게 다듬 지 않고 울퉁불퉁한 모과나무의 개성을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삼은 선인들의 심미안(審美眼)이 부럽기만 하다.
암주인 명완(明完)스님의 툭툭 던지는 얘기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그러나 정작 요즘 절의 속사정을 털어놓는 대목에서는 왠지 허허로워진다.
『요즘 암자에는 큰스님들이 안보이지요.원래 암자란 도인(道人)들이 엄격한 큰절 생활을 떠나 걸림없이 자재하게 수행하는 곳인데 말이오.』 그래서 명완스님은 큰스님이 올 때까지 구층암을지키겠다고 한다.듣고 보니 그것도 스님에게는 또다른 수행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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