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작가 이청준, 천형이었던 창작의 고통 내려놓고 하늘로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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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고통은 천형(天刑)”이라던 고 이청준 선생. 그 천형을 기꺼이 짊어지며 수많은 작품을 써 낸 고인은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사진은 집필에 몰두하던 생전의 모습. [중앙포토]

지난해 11월 이청준 작품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열림원)가 출간됐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문단은 이내 시름에 빠졌다. 그가 서너 달쯤 전부터 폐암과 투병을 계속해왔다는 소식이 작품집 출간과 함께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의 목소리는 ‘빨리 소설책을 내라’라고 재촉했다”고 털어놨다. “항암제 주사 맞고 한 주 쉬고, 또 주사 맞고 두 주 쉬기를 네 차례 되풀이한 끝에 나온 책”이라는 것이다. 그때 그는 폐암 2기였다.

이청준은 일찍이 “창작의 고통은 천형(天刑)”이라 일렀다. 그 천형을 이겨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다만 소설을 썼다. 잠깐 한눈판 적도 없었다. 부지런히 소설을 썼고, 또 썼다. 그렇게 쓴 소설이 200편이 넘는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이청준은 소설가였다.

◇바닷가의 문학소년=이청준은 1939년 다도해 푸른 뱃길이 내려다보이는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웠고 형제는 많았다. 5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지만, 그가 여섯 살 때 막내 동생과 맏형은 홍역과 폐결핵을 앓다 차례로 세상을 떴다. 이태 뒤인 46년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 뒤로 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가 떠맡았다. 맏형은 문학청년이었다. 책이 많았고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어린 이청준은 맏형이 책 행간에 적어둔 짤막한 소회와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찾아내 읽었다. 이 은밀한 독서 체험으로 소년은 문학에 눈을 떴다.

54년 고향의 초등학교를 마친 이청준은 광주서중에 합격하면서 집을 떠나 친척집에 몸을 맡긴다. 더부살이 형편에 마땅한 선물 전하기가 버거웠던 어머니는 갯벌에 나가 온종일 잡은 바닷게 한 자루를 그의 손에 들려 보낸다. 광주까지 가는 길에 게는 모두 곯아 쓰레기통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이 ‘게 자루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친척 누님이 코를 막고 당장 그 상한 게 자루를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을 때, 나는 마치 그 쓰레기통 속으로 자신이 통째로 내던져 버려진 듯 비참한 심사가 되었다.’ (단편 ‘키 작은 자유인’ 부분).

◇한글세대를 대표하다=60년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독문과에 진학한 그는 신입생 때 4·19를 겪고, 2학년 때 5·16을 지켜봤다. 그 시절 이청준과 함께 문학을 시작했던 이들이 이른바 ‘한글세대’다.

고(故) 김현(1942∼90)을 비롯하여 김병익·김주연·김치수 등 소위 ‘문학과지성 1세대’와 문학적 동지로서 평생을 함께했다. 특히 문리대 동급생 김현과는 30년 넘도록 막역한 사이였다. 문단에선 아직도 김현이 이청준을 “이가, 이 촌놈아”라 부르곤 했던 일화를 꺼내들곤 한다.

그러나 그들도 이청준의 개인사를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64년, 변변한 거처가 없던 이청준은 문리대 본관에 밤마다 숨어 들어가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궁핍을 입에 담지 않았다. 김현도 “나는 그가 그의 글 속에 피력한 과거 외에는 그의 과거를 거의 모른다”고 토로한 바 있다.

대학 졸업반이던 65년, 그는 월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퇴원’이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졸업과 동시에 ‘사상계’에 입사했고, 그해 단편 ‘병신과 머저리’를 발표했다. ‘병신과 머저리’의 원고료로 그는 마지막 남았던 형의 장례비를 치렀다. 그 뒤 장편 『당신들의 천국』이 큰 성공을 거두고 78년 발표한 중편 ‘잔인한 도시’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이청준은 김승옥과 함께 한글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섰다.

◇가난, 그리고 어머니=이청준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두 산맥이 있다. 가난과 어머니다. 그리고 이 두 산맥이 맞닿는 곳에, 한국 현대소설 사상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 『눈길』(1977)이 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이청준이 광주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의 형이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집을 팔았다.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향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고향집에서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웠다. 새 주인에게 사정해 하루만 집을 빌린 것이다. 어머니는 꼭두새벽에 눈 쌓인 비탈길을 걸어 아들을 읍내까지 배웅하고 돌아갔다. 혼자 돌아가는 눈길에 아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며 온기가 느껴지는 그 흔적을 따라 밟으며 마을로 돌아갔다. 오목오목 디뎌둔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어린 나이부터 객지를 떠돌던 그에게 어머니는 차라리 신앙이었다. 그의 호 ‘미백(未白)’은 ‘아직 희지 않다’라는 뜻이다. 여기엔 일찍 서리가 내려앉은 백발을 노모 앞에서 보이기 민망한 자식의 마음이 담겨 있다. 96년 치매를 앓던 어머니 김금례 여사가 95세를 일기로 돌아가시자 그는 이를 소재로 삼은 장편 『축제』를 쓰기도 했다.

끝으로 김현과의 일화를 하나 적는다. 70년대 얘기다. 그때 김현은 이청준에게 이렇게 농을 쳤다.

“이가 너 인제 소설 그만 쓰고 죽어버려라. 여기서 더 욕심 내봐야 되 지도 않을 노릇! 이쯤에서 만족하고 그만 끝내버려! 하지만 그전에 내 술 한 잔 사줄 테니 공연히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지금 반포치킨으로 달려와!”

이제 18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친구, 저승 어느 선술집에 함께 앉아 거나하게 회포를 풀고 있겠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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