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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건설업<下> 실수요자까지 ‘겹겹 규제’… 미분양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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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대림동 112㎡ 아파트에 10년째 사는 자영업자 박모(45)씨는 넓은 집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최근 포기했다. 직장과 가까운 상도동에 분양 중인 148㎡ 아파트를 마음에 뒀지만 대출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 분양가는 9억7000만원. 여섯 차례에 걸쳐 나눠 내는 중도금만 회당 1억원 선인데 은행은 한 회분도 대출해 주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로 소득에 따라 대출액이 정해지면서 소득 증빙이 어려운 자영업자는 대출받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박씨는 “몇 년 새 분양가가 크게 올라 대출을 끼지 않고는 분양받기 어려운데 지나친 규제로 실수요자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30일 오전 경기도 분당 오리역 인근 아파트 견본주택 밀집지역. 용인 수지구에 짓는 3개 단지 견본주택 안에는 분양상담사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양업체 관계자는 “주택 수요가 없는 게 아닌데 정부 규제로 수요가 너무 줄었다”고 말했다. 용인 수지에서 나온 아파트들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인기를 모았다. 판교·광교신도시의 후광 효과 기대감으로 지난해 9월 분양된 용인 동천래미안은 최고 197대 1의 청약경쟁률을 기록했다. 그러다 지난해 말 분양가 상한제가 민간택지로 확대되면서 시장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 지역에 올해 분양된 아파트들의 청약률이 뚝 떨어져 현재 40%가량이 미분양 상태다.


◇실수요자에 길 터줘야=전국 미분양 아파트 수는 5월에 12만8170가구로 1995년 10월(15만9471가구) 이후 13년 만에 최대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미분양은 원인이 약간 다르다. 무엇보다 90년대 미분양은 공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80년대 말 정부의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에 따라 90년대 전반기 5년 동안 매년 60만 가구 이상의 새 아파트가 쏟아졌다. 특히 분당·일산 등 1기 신도시 입주가 본격화된 93년부터 미분양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지금의 미분양은 집을 많이 지은 탓도 있지만, 과도한 정부 규제가 주된 원인이 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출 규제, 양도소득세 중과 등으로 주택 수요자의 손발을 묶으면서 실수요까지 옴짝달싹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A건설사 주택사업본부장은 “외환위기 때는 그래도 실수요자가 있어 분양가를 낮추면 미분양이 해결됐지만 지금은 백약이 무효”라고 말했다. 서울 목동 매일공인 김흥주 사장은 “살던 집을 팔지 못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려는 엄두조차 못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분양권 전매 금지 등 모두 열두 차례에 걸쳐 굵직한 부동산 대책을 내놨다. 서강대 김경환 교수는 “지금 나타나고 있는 여러 부작용은 반시장적인 부동산 수요 억제 정책에 따른 결과”라면서 “기능이 마비된 주택거래시장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규제 완화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투기는 막아야=정부가 규제를 풀더라도 투기는 차단해 주택시장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실수요자들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를 내놔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김헌동 단장은 “외환위기 이후에 부동산 규제가 한꺼번에 없어지면서 건설경기는 살아났지만 주택시장은 투기판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실수요를 살리기 위한 정교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신한은행 이남수 부동산팀장은 “무주택자가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할 경우나 소형 주택에 살던 1주택자가 집을 넓혀갈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대출 규제를 완화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규제 완화에 따른 주택시장 불안을 우려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세종대 변창흠 교수는 “주택 수요가 뜸해진 건 고금리와 경기 하락 등이 맞물린 결과”라며 “시간이 지나면 미분양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규제를 완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조철현·함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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