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외교안보 위기의 근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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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명박 정부는 선진화를 통한 세계 일류국가 건설을 국가비전으로 내세웠다. 경제와 삶의 질을 선진화하고, 국제규범의 능동적 수용을 통해 세계에서 인정받는 고품격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섬기는 정부, 활기찬 시장경제, 능동적 복지, 인재대국, 성숙한 세계국가를 지향한다는 5대 국정지표도 제시했다.

모래 위에 성을 쌓을 수 없듯이 고대광실(高臺廣室)도 지반이 약하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자칫 실수로 불이라도 나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수도 있다. 마음이 급한 탓인지, 생각이 짧은 탓인지 이명박 정부는 기초공사는 무시하고 골조부터 세우려 했다. 그 결과 여기저기서 사고가 줄줄이 터지고 있다.

주변 4강에 포위되고, 남북이 분단된 한반도처럼 지반이 약한 곳도 드물다. 안정이 흔들리고 평화가 깨지면 애써 지은 집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취약한 구조다.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국가이익의 최우선 순위에 둘 수밖에 없다. 번영과 통일이 그 다음이다. 아무리 경제 살리기가 급하더라도 돈이 평화에 우선하는 가치일 순 없는 것이다.

‘남북관계만 잘되면 다른 것은 깽판쳐도 좋다’는 노무현식 발상도 문제지만 ‘경제만 잘되면 된다’는 이명박식 발상도 문제다. 둘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심화되고 있는 외교안보 위기의 근원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한 데 있다. 경제 대통령을 자임한 이 대통령은 지금 비로소 남북관계와 외교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부터 국정의 큰 철학을 새로 가다듬어야 한다. 왜 집권했는지, 집권을 통해 궁극적으로 뭘 이루고자 하는 것인지, 대통령이란 직책이 어떤 자리인지 곰곰 되새겨야 한다. 그 후 국정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고, 이에 맞춰 밑그림을 새로 그려야 한다.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충족적 예언’의 함정에 빠져 있는 점이다. 우리가 성심을 보이면 상대방도 성심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아마추어리즘이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서 금강산 피격 사건, 독도 파문에 이르기까지 대북·대미·대일 외교에서 연이어 뒤통수를 맞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냉정하게 정세를 판단해 잠재적 사고 위험에 미리 대비토록 하는 것이 외교안보에서 진정한 프로의 역할이다. 위험을 감지하는 것 못지않게 있는 그대로의 위험을 대통령에게 제때 알려 최적의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 정부의 외교안보팀에는 소명의식이 안 보인다. 나라를 위해 직을 걸고 대통령에게 직언과 고언을 하는 진정한 공복(公僕)의 자세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자리를 보전하고, 오래 버틸 궁리나 하고 있다. 책임지는 용기도 없다. 아닌 사람도 있지만 무사안일과 보신주의에 길들여진 영혼 없는 공무원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상대조차 안 되는 북한과 냉전시대식 대결외교나 벌이는 유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총설계사고 총감독이다. 새벽부터 현장에 나가 설치는 공사판 십장이 아니다. 자기 철학을 바탕으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리고 애국심과 소명감을 갖춘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에게 외교안보의 컨트롤 타워를 맡겨야 한다. 그것이 외교안보의 총체적 난국을 수습하는 길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