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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씨 측근 피고인 3인의 답변-장세동.허화평.박준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2.12당시 전두환(全斗煥)보안사령관을 최측근에서 보필,「거사」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장세동(張世東).
허화평(許和平).박준병(朴俊炳)피고인.
25일 열린 3차공판에서 張씨는 배짱,許씨는 달변,朴씨는 논리로 12.12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검찰과 불꽃 공방을 벌여5공 방위 신(新)3인방(幇)으로 등장했다는 평을 들었다.
張씨는 자신의 30경비단을 장성들의 모임장소로 제공한 것에 대해『장군들 몇분이 갈테니 차나 한잔 대접하라는 全피고인의 지시에 따랐을 뿐 다른 것은 전혀 몰랐다』는 「모범답안」을 냈다. 그는 『직무상 평소 근무지를 비울 수 없어 뵙기 힘든 분들을 만난다기에 영광으로 생각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보안사 상황실및 각 부대에 연결된 통신을 이용,정보를 수집해 이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보안사와 30경비단은 협조부서가 아니라 견제부서』라고 발뺌한뒤 『그날밤 30단 부단장이보안사령부에 경비문제를 협의하러 가지 않았느냐』 는 공세에도 고개를 저었다.
朴씨는 군시절 지장(智將)으로 알려진대로 논리정연한 답변으로검찰 신문을 비켜갔다.
朴씨가 지휘한 20사단 병력이 수도권으로 통하는 길목에 포진,육본측의 병력출동을 저지하지 않았느냐는 검찰신문에 『서울 근교 불암산 훈련장에 주둔한 62사단은 3천여명에 불과한데 막강한 26사단.수도기계화사단에 대항한다는 것은 견강 부회(牽强附會)』라고 응수했다.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인 許씨는 검찰신문 대부분을 『처음듣는 얘기』『그런 사실없다』등 부인으로 일관했다.
許씨는 즉답을 묻는 질문에 당시 상황등을 장황하게 설명하려다재판장으로부터 『예,아니오로 간단히 답하라』고 여러차례 제동이걸리기도 했다.
許씨는 『80년 당시 12.12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것은 병력동원을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 아니냐』는 질문에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고 전제한뒤 『유혈사태 방지를 위해 임무를완수하기 위한 조치였다.다만 정권이 아직 자리 잡지 못했고 군내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전히 뜨거운 상태라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 했을 뿐』이라고 거침없이 답변했다.
김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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