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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를 탐험하다 - 오렐 스타인 ① 소년, 알렉산더를 꿈꾸다.

중앙일보

입력

실크로드를 넘나들며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탐험가들을 언급한다면 영국의 오렐 스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을 빼놓을 수 없다. 오렐 스타인은 소년 시절 탐험가의 세계에 매료된 그 순간부터 죽는 날 까지 외길만 걸었던 인물이다. 제1세계 탐험가가 순수하게 존경받기란 어려운 일. 오렐 스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동양인들에게 오렐 스타인은 아무리 잘 봐줘야 ‘보물 사냥꾼’이며, 보다 냉정하게는 ‘강대국의 도굴꾼’이라는 비난의 시선을 받는다. 물론 영국인들은 전혀 딴 판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험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하지만 오렐 스타인은 영국 출신은 아니다. 그는 중년 이후에야 영국민이 된다. 실제로 그는 1862년 11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의 늦둥이였고, 스무 살 가량 나이 차이가 나는 누나와 형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오렐 스타인을 ‘탐험가 중의 탐험가’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대부분의 커다란 영향이란 멀고 먼 옛날이야기에서 싹튼다. 오늘날의 아이들이 <해리포터>를 읽거나 보면서 꿈을 키운다면, 당시 유럽 상류층 자녀들에게는 마르코 폴로의 탐험기가 있었다.
동방 세상에 관심이 깊었던 누나는 그 환상을 막내에게 그대로 전했다. 한편 열아홉 살 차이가 났던 스타인의 형은 전쟁과 역사에 일가견이 있었다. 아버지는 스타인에게 이미 모험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또 하나의 작은 우주인 서재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스타인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동양을 향한 호기심을 키우거나 전쟁 영웅들을 흠모하며 자신의 진로를 탐험가의 길로 정했다. 형의 영향으로 전쟁영웅을 추앙하게 된 스타인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기꺼이 점령당한 상태였다. 그는 알렉산더의 원정길을 그대로 밟아 보는 것을 목표로 정해두었다. 그리고 생의 최후를 맞을 때까지 그는 그 목표를 실천했다.
독일 드레스덴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스타인은 동양학을 접하게 된다. 신비한 동방의 세계에 기어코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려는 꿈을 자가발전 시키기에 딱 알맞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부였다. 스타인은 빈 대학교와 라이프치히 대학, 튀빙겐 대학 등으로 옮겨 다니며 아시아의 역사 뿐 아니라 각 나라의 고대 언어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스타인이 구사하는 언어만 그리스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프랑스어, 영어, 페르시아어 등 8개 국어에 달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스타인에게 고스란히 들어맞았다. 그는 당나라의 현장현장(玄奬)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현장스님은 7세기 경 불교의 원천을 찾아 몸소 인도를 방랑했던 고승이다. 현장이 17년간 인도 곳곳을 여행하며 쓴 <대당서역기>는 스타인이 상상 품고 다닌 길잡이인 동시에 안내서가 되었다.
1887년 말, 스타인은 책에 대한 탐험을 실제 세상에 대한 탐험으로 옮기게 된다. 인도는 그의 첫 여행지였다. 인도령이었던 파키스탄에 도착한 그는 그 여행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결정한다. 1898년 9월, 그는 긴 세월동안 꿈 꾸어왔던 중국령을 밟아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것은 그가 실크로드로 들어서기로 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실크로드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명나라를 겨우 밟고 일어선 청나라가 그 지배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 틈을 타서 서구의 열강들은 중국 대륙에 모두 흑심을 품었고 그 커다란 땅덩이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벌건 대낮에도 강도가 판을 치는 혼란기. 길이란 길은 모두 위험을 품고 있는 노상 폭탄이었다. 당연히 스타인의 탐험길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스타인에게는 훌륭한 파트너가 있었다. 기초학문에 충실한 그는 지도 작성을 해줄 측량기사를 항상 대동했다. 이들은 수개월에서 수년 단위로 도보행군을 하며 탐험생활을 즐겼다.
이국의 날씨와 자연환경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스타인은 날마다 일기를 쓰며 지형마다 돋보이는 강이며 나무 짐승들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으며 측량기사는 이를 그림으로 그려 지도 에 반영했다. 그들은 아무리 높은 봉우리라도 직접 걸어가 확인해보는 식으로 행군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탐험이었던 것이다. 스타인은 빙산에 갇히는 바람에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내 가면서도 극한의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극한의 걷기에 대한 보상은 마을 곳곳을 직접 돌면서 사람들의 삶을 깊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들로 대체됐다. 1,600미터가 넘는 빙하를 건너다니고, 파미르 고원에서 안개와 함께 파묻히고, 고산지대에서 환청 증세를 보이는 것들 모두가 탐험가들이 경험하는 보상 여러 모습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한 것은 사막으로 들어서기 위한 몸부림 이었다. 그렇게 빙하와 사막을 견디면서 그가 얻어낸 것은 어릴 적부터 그토록 상상해왔던 동양세계와 불교문화의 발원지로의 입성이었다.
이 과정에서 획득한 방대한 지리학적 조사물과 각 유적에서 얻은 고문서, 고대 화폐, 예술품 등은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갔다. 스타인의 제1차 중앙아시아 탐험은 대성공이었다. 스타인은 곧바로 유명인사가 됐고 영국 정부는 그 어느 때 보다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는 영국정부에게 감동한 스타인은 1904년 마흔 초반의 나이에 영국 시민으로 귀화했다.

그림 및 자료 / 이시원
글 / 장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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