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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 중국 근대화 앞장선 120명의 官費 유학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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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8월 상하이를 출발하기 직전 소년 유학생들의 모습. 김명호 제공

1870년 청나라 조정은 미국에 파견할 소년 관비 유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유학총부(留學總部)’를 창설했다. 쩡궈판(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예산 100만 달러를 확보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이었다. 1847년 미국 예일대에 한 명의 중국 학생이 입학한 지 25년 만이었다. 지원자가 없을까 봐 걱정했지만 바다 건너 세계와 접촉이 빨랐던 광둥(廣東)과 장쑤(江蘇) 지역에서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거나 혜안이 있는 부모를 둔 소년들이었다. 명문 세가나 고위 관료 집안의 자식들 중에는 지원자가 없었다. 총질이나 할 줄 아는 오랑캐의 땅에 귀한 아들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30명을 선발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비교적 부유한 농민이나 개화된 중소상인 집안 출신들로 평균 연령은 12세였다.

대청제국이 파견하는 아동들이었다. 배워야 할 것도 많았지만 오랑캐들을 교화할 의무도 있었다. 총명하고 용모와 품행이 단정해야 했다. 이름이 너절한 경우에는 부모에게 우아하고 품위 있는 글자를 사용해 개명하게 했다. 군사·항해·의학·법률·건축·화학·지질학·천문학·자연철학 중 한 과목을 전공하되 귀국을 명하면 즉시 돌아오며,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학업을 마친 후 미국 직장에 취업하지 않는다는 각서도 받았다.

1872년 8월 11일 세 명의 감독관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관비 유학생이었다. 요코하마에서 배를 바꿔 타고 35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근엄한 복장에 변발을 한 노제국(老帝國)의 소년들은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건물에 넋을 잃었고 승강기를 타본 후에는 며칠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기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최종 목적지 코네티컷주 하트퍼드(Hartford)까지 7일간의 기차여행을 따를 만한 것은 없었다. 이때 충격을 받은 한 소년은 32년 후 중국 최초의 철도인 징장(京張) 철도(北京∼張家口)를 설계하게 된다. 서부영화에 많이 나오는 전설적인 열차 강도 제시 제임스(Jessy James)가 한창 활동할 때였다. 2차 유학생들은 실제로 제임스 일당과 조우했다. 불과 30분 만에 기병대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전보(電報)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2차 유학생들 중에는 후일 통신 계통에 종사한 사람이 많았다.

하트퍼드는 보험·출판 산업의 중심지였고 1인당 평균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유학총부는 5만 달러를 들여 ‘중국출양사업국(中國出洋事業局)’을 지어 놓고 유학생들을 기다렸다. 출양사업국 위원과 교사들의 거처 외에 학생 숙소와 대형 교실이 구비된 3층짜리 대형 건물이었다. 4년 전 이사 온 문호 마크 트웨인의 집과 이웃이었다. 유학생들은 인근의 초등학교에 다니며 숙소에 돌아오면 중국인 교사들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중국의 고전을 교육받았다. 이들을 파견한 가장 중요한 목적이 ‘중체서용(中體西用)’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30명씩 4년간 미국에 파견한 소년 유학생 120명 중 50여 명이 고등학교를 마친 후 하버드·예일·컬럼비아 등 명문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1881년 6월 정부는 “장기간의 미국 체류로 중체서용은커녕 ‘전반서화(全盤西化)’가 우려된다”는 총리아문(總理衙門)의 주청에 따라 유학생을 모두 소환했다. 마지막 유학생을 파견한 지 6년 만이었다.

120명 중 23명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고 세 명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명이 종교적인 이유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돌아올 때는 93명이었다. 후일 중국의 초대 내각총리 탕사오이(唐紹儀)와 칭화(淸華)대학 초대 교장 탕궈안(唐國安)을 비롯해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발탁돼 부산과 원산 세관에서 10여 년간 근무했고 인천 총영사를 지낸 홍콩의 원로 저우서우천(周壽臣), 중국 철도의 아버지 잔톈유(詹天佑) 등이 그 안에 포함돼 있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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