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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7> 위안스카이에게 청 왕조 헌납한 룽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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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월 퇴위 뒤 태감들과 함께 자금성을 산책하는 룽위(오른쪽에서 세번째). 김명호 제공

룽위(隆裕)는 서태후(西太后)의 친조카였다. 19세에 자금성에 들어와 이듬해 광서제(光緖帝)의 황후가 됐다. 수줍어하고 부끄러움을 잘 탔지만 서태후를 믿고 우쭐거릴 때가 많았다. 광서제는 툭하면 서태후에게 달려가 일러바치는 룽위를 서태후의 밀정으로 여겼다.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보기만 하면 신경질을 부렸고 모든 화풀이를 룽위에게 했다. 말대꾸한다며 룽위가 꽂고 있던 비녀를 뽑아 돌바닥에 패대기쳐 건륭제(乾隆帝) 때부터 내려오던 소중한 물건을 산산조각 낸 적도 있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데다 서태후의 몸종 비슷하다 보니 왕공(王公) 귀족(貴族)의 부인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사람을 시켜 베이징의 전당포에 패물을 저당 잡히곤 했다. 황후의 패물을 착용하고 다니는 전당포 안주인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말이 황후일 뿐 비참한 궁중생활이었다. 양잠과 병아리 키우는 일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부화에 성공한 병아리를 볼 때마다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1908년 광서제와 서태후가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태후는 임종에 즈음해 세 살이 채 안 된 푸이(溥儀·선통제)를 황제로, 생부인 다이펑을 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에 봉해 국정을 관장케 했다. 중요한 일은 황태후로 지정한 룽위와 의논토록 했다. 섭정왕 다이펑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곤란한 일일수록 룽위에게 떠넘길 때가 많았다. 룽위는 중요 정책을 결정할 기회가 많아졌다.
룽위는 생각이나 수완이 서태후에게 미치지 못했다. 서태후의 장점을 배우지 못한 채 나쁜 점만 그대로 따라했다. 국상(國喪) 기간 중 대형 토목공사를 시작해 오락 기능밖에 없는 ‘수정궁’을 축조했고, 섭정왕이 임명한 대신들을 며칠 만에 갈아치우곤 재미있어 했다. 서태후가 태감(太監) 리롄잉(李蓮英)을 총애하고 믿었던 것처럼 룽위 역시 장란더(張蘭德·일명 小德張)라는 내시를 총애했다. 그가 하는 말을 잘 믿었다.
1911년 신해년, 남방에서 공화제를 표방한 혁명군이 봉기했다. 이들은 무력충돌을 바라지 않았다. 황실 우대조건을 제시하며 황제 퇴위를 압박했다. 룽위는 진압을 주장했지만 북양신군(北洋新軍)의 설립자인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매수당한 장란더가 “공화제가 돼도 황후의 존엄에는 손상이 없다. 섭정왕만 날아갈 뿐”이라고 주장하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위안스카이는 “혁명세력이 요구하는 황실 우대조건을 받아들이자”며 난생 처음 들어보는 프랑스 혁명을 예로 들었다. 군권을 장악한 위안의 협박 반, 회유 반에 룽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황족의 접견 요청에 대해선 “꼴도 보기 싫다”며 거절하고 황제 퇴위 조서를 발표해 버렸다. 동시에 ‘임시공화정부’ 조직의 전권을 위안스카이에게 일임했다. 위안은 공화제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민국(民國)을 선포했다.
청 왕조는 붕괴됐지만 위안스카이와 협약한 황실 우대조건에 의해 룽위와 푸이는 여전히 궁궐에 머물며 태후와 황제의 존호를 유지했다. 룽위는 염불을 하거나 태감·궁녀들과 궁궐 안을 산책하며 노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생활이 정상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기거와 음식에 절제력을 상실했다. 시종들은 룽위가 움직일 때마다 침구와 음식을 싸 들고 뒤를 따랐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졸리면 자고 깨면 먹기만 했다. 결국 퇴위 1년여 만에 무절제한 탐식으로 위장이 팽창해 룽위는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수천 년의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태후답지 않은 쓸쓸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장례식은 어느 황후나 태후 못지않게 융숭하고 정중했다. 총통 위안스카이는 이 고마운 여인을 위해 전국에 사흘간 조기를 게양케 하고 27일간 상복을 입었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왕위를 선양한 요순(堯舜)에 비유해 ‘여자요순(女中堯舜)’이란 네 글자를 영당(靈堂) 한가운데 드리우고 ‘전 국민 애도대회’까지 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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