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0> 국민당 정부의 황금 수송 大작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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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중앙은행 직원이 대만으로 보낼 황금을 점검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1980년대 말 국제적인 대기업도 없고 관광이 주 수입원인 줄 알았던 대만의 외환보유액이 일본을 능가했다. 주변국들은 대만의 중소기업이 어떻고 화교자본이 어떻다는 둥 온갖 가설을 다 들이대며 원인을 분석하기에 바빴다. 정작 대만 사람들은 국민정부가 49년 대륙에서 철수할 때 갖고 나온 황금 덕분이라며 총통부 지하가 전부 금이라고 수군대는 사람이 많았다. 국민정부가 다량의 황금을 갖고 나온 게 사실이라면 그 양은 어느 정도였을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중화민국 정부는 48년 말 대만에서 새로운 기지의 구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0월 27일을 기해 대만의 식량과 물자가 대륙으로 유입되는 것을 금지했다. 연이어 국민당의 자산과 당원들의 개인 재산을 대만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국가가 소유하고 있던 황금·백은·외화와 현재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관 소장품인 문화재들도 포함됐다.

고궁의 문화재는 옮기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황금은 그렇지 않았다. 대만 철수를 결정했을 때 총통 장제스(蔣介石)는 하야한 상태였다. 대리 총통 리쭝런(李宗仁)은 공산당과 평화협정을 추진 중이었다. 중앙은행의 황금은 리쭝런이 협상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 중 하나였다. 장제스는 총통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국민당 주석이며 3군 총사령관이었다. 군(軍)도 당(黨)의 군대였다. 60여만 명의 병력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양병(養兵)은 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중앙은행이 비축하고 있는 황금을 대만으로 옮기게 했다.

황금은 세 번에 나누어 운반됐다. 48년 12월 1일 오후 경비사령부의 계엄하에 선적된 황금 200만4000냥(兩)을 실은 군함이 심야에 상하이 와이탄(外灘)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대만의 지룽(基隆)항이었다. 두 번째는 52만2000냥을 대만과 마주한 샤먼(廈門)으로 우선 옮겨 놓았다. 마지막 운반은 상하이가 함락되기 10일 전이었다. 난징·상하이·항저우 지구경비사령관이 직접 19만8000냥을 대만으로 운반했다. 총 277만 냥, 49년 시가로 미화 약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은원권 1520만 위안과 미화 1537만4000달러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감찰원 재정위원회의 비밀 보고서는 중앙은행이 황금 420만 냥과 미화 7000만 달러, 7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백은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왕 옮기는 것 치고는 많은 양의 황금과 미화 등을 그대로 두었다. 다시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였다.

사연 많은 황금과 외환이었다. 48년 8월 20일 국민정부는 상하이에 ‘재정경제 긴급처분명령’을 반포했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금은과 외환을 금원권(金圓券)과 바꾸게 했다. 미화 1달러가 금원권 4위안이었고 황금 1냥은 200위안이었다. 집안에 깊숙이 두었던 금은과 외화가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얼마 후 화베이 지방의 전세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중공은 노획한 금원권을 남방의 도시에 풀어놓았다. 상하이의 물가는 순식간에 고삐 풀린 야생마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금원권 100만 위안이 미화 1달러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법을 준수한 사람일수록 피해가 컸다. 국공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일반 국민이었다.

금원권 개혁의 집행자는 장징궈(蔣經國)였다. 황금을 대만으로 운반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80년대 중반 총통 시절 “당시 상하이 사람들은 정부를 지지했다. 금은과 외화를 들고 다투듯이 은행에 달려왔다. 그들은 큰 손실을 보았다. 많은 사람이 파산했다.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는 날 그들에게 몇 배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복리로 이자를 덧붙여 계산해 보게 했다. 약 450억 달러였다.

장징궈는 87년 7월 38년에 걸친 계엄령을 해제했다. 그리고 4개월 후 대륙에 있는 친지 방문(探親)을 허용했다. 휴대할 수 있는 돈의 액수도 까다롭게 제한하지 않았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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