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 "魯迅 이후엔 張愛玲"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1994년 7월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을 다룬 신문을 들고 찍은 이 사진이 짱아이 링이 남긴 마지막 모습이다. [김명호 제공]

한때 동거했던 사람의 말이지만 "루쉰(魯迅) 이후엔 짱아이링(張愛玲)"이라는 소리를 듣는 작가 짱아이링은 명문 출신이었다.

조부 짱페이룬뤈(張佩綸)은 여섯 살에 군벌의 창시자 쩡궈판(曾國藩)의 사숙에 들어갔다. 대담한 성격에 문장과 서법에 뛰어나 총애를 받았다. 사방 만리를 통틀어 한 명 나올 수 있는 인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23세에 대과에 급제했다. 그의 상소문은 비견할 자가 없었다. 특히 군사문제를 논한 상소는 보는 사람을 황홀케 했다. 전황 분석과 적절한 작전 제시 등 막힘이 없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군들도 그 앞에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兵)을 아는 기재(奇才)로 인정받았다.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졌다. 그를 얄미워하던 사람들이 합심해 전선에 파견할 것을 주장하는 바람에 실전을 지휘케 됐다. 입으로만 병(兵)을 논하던 그에겐 날벼락이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 혼비백산했다. 한밤중에 장대 같은 빗속을 뚫고 도망쳤다.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고 웃음거리가 됐다. 어린 시절 짱아이링은 전쟁과 관련된 조부의 일을 아버지에게 자주 물었고 그때마다 야단을 맞았다.

리훙장(李鴻章)은 짱페이룬뤈에게 딸을 출가시켰다. 리훙장의 부인은 짱의 나이가 딸보다 스무 살이나 많고 죄인이나 다름없는 주제에 먹는 것만 밝힌다며 기를 쓰고 반대했다. 짱페이룬뤈은 소문난 미식가였다. 딸도 싫어했지만 리훙장이 높이 평가한 것은그의 문장이었다. 음식에 조예가 깊은 것도 교양인이라는 증거였다.

짱페이룬뤈의 문재(文才)를 손녀 짱아이링이 이어받았다. 짱아이링의 생모는 아편 중독자인 남편과 어린 두 딸을 두고 유럽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엔 운전사와 가출해 버렸다. 부친은 북양정부 총리의 딸과 재혼했다. 계모는 결혼 전 입었던 옷을 짱아이링과 동생에게 입혔고 새 옷을 사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이 엄마를 닮아 성격이 못됐다며 다락방에 가두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짱아이링은 다락방의 작은 창문을 바라보며 수많은 상상을 창틀 속에 채워놓곤 했다.

중학생 시절 짱아이링은 천재 소리를 들었다. 런던대에 합격했지만 전쟁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홍콩대에 입학했다.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자 상하이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써도 끝이 없었다. 23세 때 후란청(胡蘭成)을 알게 됐고 동거했다. 후는 일본을 위해 일하는 '문화 매국노(文化漢奸)'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는 망명했다. 몸 둘 곳이 없어진 짱아이링은 미국으로 건너가 죽는 날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후란청은 대만에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섰지만 과거 전력 때문에 오래 있지 못했다. 그는 귀재였다. 대만에 머문 기간은 짧았지만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영화로 더 유명한 '비정성시(悲情城市)'는 그를 신처럼 모시던 제자의 작품이다. "루쉰 이후엔 짱아이링”이란 말을 한 것도 후였다.

짱아이링의 만년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적막 그 자체였다. 피부병이 심해 옷도 종이로 만들어 입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보도한 신문을 들고 생애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그는 한국과 별 인연이 없었다. 무용가 최승희가 유일한 한국인 친구였다.

짱아이링은 1995년 9월 세상을 떠났다.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가 시신을 발견했다. 사망 일자도 불분명하다.

그의 죽음은 반세기 동안 잊혀졌던 그를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됐다. 후란청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아직은 없다.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